중편소설 ‘별내리’의 줄거리
여명종합건설에 근무하는 노심 부장은 어느 날 충남 옥천의 한 집을 방문한다. 노심은 그곳에서 뜻하지 않게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당황한 노심이 달아나던 중 과속으로 경찰의 단속에 걸리고, 노심을 단속하던 경찰관은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된다. 노심 부장은 일련의 사건들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고, 일이 점점 커져 감당할 자신이 없던 노심 부장은 도움을 청하는데….
1.
충청북도 옥천군의 별내리는 흔히 류 씨(柳 氏) 네 마을로 불리었다. 조선왕조의 건국공신인 충렬공 류덕환이 별내리에 뿌리를 내린 이후, 류 씨 가문의 자손들이 이 마을의 부와 권력을 쥐락펴락하였다. 산과 초목으로 너른 별내리에서 쓸 만 한 땅은 류 씨 네 소유였다. 왕 씨 군주대신 이 씨를 임금으로 모시는 대가로 받은 류 씨 네 옥답과 나지막한 야산만은 두메산골 별내리에서 알짜배기였다.
빈곤한 별내리 주민들은 류 씨 네 논밭에서 소작일로 먹고 살았고 류 씨 네 야산에서 나무를 해다 불을 지폈다. 사람들은 모두가 함께 누리던 옥토를 류 씨 네가 독점함으로써 주민들이 궁폐하여진 것이라는 불평조차 하지 않았다.
류 씨 가문이 별내리를 해처럼 밝히고 있을 때만하여도 유교의 지배정신은 굳건하였고 군주의 권위는 삼엄하였다. 충렬공 류덕환과 이후 초기 류 씨 네 사람들의 성품이 온화하여 별내리 주민들은 큰 불만 없이 운명에 순응하였다.
류 씨 네 마을 사람들은 박 참봉의 횡포에 고통스러워하는 옆 마을 사람들과 견주어 보며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비록 류 씨 네 사람들이 별내리를 지배한 덕인지, 탓인지 그들은 고을 외부의 빛나는 문물에 먼저 눈을 떴고 하나 둘 별내리, 류 씨 네 마을을 등졌다.
그들은 한 결 같이 마땅한 일거리가 없는데다 자식농사를 지을 만한 토양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였다. 별이 쏟아지는 고을, 별내리는 산 좋고 물 맑은 것 빼고는 그리 내세울 것 없는 빈곤한 곳이었다. 주상의 고을인 경(京)에서는 수 천리, 충(忠)과 청(淸)이라 불리는 주(州)에서 수 백리는 떨어진 곳이었다.
조정의 당상관들은 변변한 전답이 없어 녹이 나올 곳 없는 별내리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왜구가 국토를 휩쓸고 갈 때도, 누르하치의 오랑캐가 전국을 약탈을 할 때도 류 씨 네 마을은 침탈자들의 눈 밖에 있었다.
시간은 별내리를 감싸 외부와 단절시킨 봉우리 사이를 흐르는 냇물이 각진 돌맹이를 구르며 구릉지게 만들 듯 더디었지만, 냇물이 각진 돌맹이를 구르는 일을 멈추지 않았듯 쉬지 않고 흘렀다.
천구백팔십팔 년, 일찌감치 상경하여 갖은 고생을 다 하던 류 씨 네 마름꾼 홍우식의 자식 영태가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검사가 되어 금의환향하던 때에는 이를 시기할 류 씨 네 자손들은 류 씨 네 마을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류 씨 네 마을이라 불렀지만, 정작 류 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고는 고작 열댓 명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충렬공 류덕환이 별내리에 자리를 잡은 지 육백 년이 지나지 않은 때였다.
대를 이어 고치고 덧붙여 지어 한옥인지 양옥인지 알 수조차 없는 낡은 집 한 채만이 류 씨 네 마을을 위태롭게 지키고 있었다. ‘충렬당(忠烈堂)’이라고 쓰인 현판에서만 옛 영화 짐작할 수 있는 그런 집이었다. 별내리 외곽에서 류 씨 네 마을을 대대로 호령하던 충렬당에 이제는 단 세 명만이 머물고 있었다.
별내리는 그 자리 그대로 있었지만 시대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하여 왔다. 농경사회를 거쳐 산업사회가 되도록 별내리 알짜 옥답과 구릉진 야산은 류 씨 네 마을 류 씨들에게 경제적 풍요로움을 제공하지 못하였다. 그 아름다운 류 씨 네 마을 알짜배기 땅의 효용은 멸종위기에 처하는 듯하였다. 적어도 류 씨 네 마을에 고속도로가 뚫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대전으로 통하는 고속도로가 별내리를 지난 지 일 년이 지난 이천팔 년 유월의 어느 날이었다. 평화롭고 한적하던 류 씨 네 마을을 찾은 한 중년 신사는 한바탕 소동에 정신줄을 놓고 말았다. 중년 신사가 겪은 그 이십구 시간은 그의 지난 이십구 년보다 더 길고 참담하였다.
2.
“최근 주택시장에 웰빙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경기도 용인․양평 등지에 대규모 전원주택 단지가 형성되고 있다. 주택건설협회 자료에 따르면 올해 전국에서 공급되는 전원주택만 천오백여 가구에 이를 정도다. 그동안 신개념 주거공간으로 이름을 알리던 전원주택이 이제 본격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평가다.”
볕 좋은 오후 충렬당 툇마루에 앉아 신문을 들여다보던 류 씨 가문의 맏며느리 파주 댁은 경제섹션 머리기사를 또박 또박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당시 류 씨 네 마을에서 가장 큰 화젯거리는 바로 부동산 관련 소식이었다.
파주 댁은 십여 년 전 경기도 파주 문산에서 충청북도 옥천의 충렬당으로 시집을 왔다. 그래서 파주 댁이라 불렸다. 삼십 대 중반의 나이지만 그녀는 여전히 새색시 때의 작고 아담한 몸매와 하얗게 빛이 나는 피부를 지키고 있었다. 핏기 없는 얼굴은 병을 앓고 있는 것처럼 연약하여 보였다.
거친 밭일로 자외선을 피할 길 없었던 마을 주민들의 주름진 구릿빛 피부와 대조되는 만큼 신분에 대한 자긍심 또한 차이를 보였다. 파주 댁의 여린 피부는 퇴락하였지만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충렬당을 지키는 안주인의 자태를 강요받은 결과이었다.
파주 댁 옆에는 일흔을 넘긴 노인이 눈을 지그시 감고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희끗한 수염을 산들바람에 흩날리며 부처처럼 느긋하게 앉아 있는 그의 얼굴은 혈색이 돌아 불그레하였다.
얇은 모시 한복 밑단으로 드러나는 얇은 팔뚝에는 옅은 핏줄이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는 류 씨 가문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 창백 옹(翁)이라 불리었다.
“아가, 좀 더 크게 읽어 보어라.”
창백 옹이 파드득 부채를 서너 번 흔들어 부치며 며느리에게 말하였다. 손에 들린 부채에는 창백 옹이 류 씨 네 마을을 손수 먹물로 찍어 그린 진경산수화가 담기어 있었다.
진경이 아닌 것은 딱 하나, 충렬당 뿐이었다. 충렬당은 창백 옹이 어린 시절을 보내며 함께한 그 때의 고풍스러운 모습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아버님, 식해랑 화전(花煎) 좀 드시면서 들으세요.”
“알았다.”
“식해는 시원할 때 마셔야 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마.”
창백 옹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건성을 대답하고는 식해에 손을 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며느리가 낭독하는 신문기사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음미하려는 듯 미간을 찌그러뜨린 채 그대로 변함이 없었다. 파주 댁은 창백 옹의 기대와는 달리 신문을 살짝 내리더니 작은 입술을 다시금 오물거렸다.
“갈아서 담은 얼음이라 쉽게 녹아 …….”
파주 댁은 시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하였지만 하고 싶은 말은 조곤조곤 다 하였다. 평소 말대꾸를 하지 않던 며늘아기의 집요함에 그제야 창백 옹은 눈을 뜨고는 식해를 담은 그릇에 눈길을 던지었다.
식해와 화전은 요리솜씨 좋기로 유명한 파주 댁이 시아버지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종종 내 놓는 메뉴였다. 적당히 설탕을 섞어 달달하게 만드는 게 파주 댁 화전의 비법이었다.
창백 옹은 알았다는 듯, 읽기를 강요하는 듯 헛기침을 한 번 하였다. 파주 댁은 삽화와 도표로 화려하게 장식된 경제면 머리기사를 눈앞에 바짝 가져다 대었다.
옥천군 별내리의 그림 같은 전경이 기사의 배경 사진으로 펼쳐져 있었다. 사진 한 귀퉁이에 충렬당의 푸른 지붕이 언뜻 내비치었다. 사진 밑에는 유망 분양예정 단지의 위치, 가구 수, 문의전화번호를 담은 표가 잘 정리되어 있었다.
“소득수준이 높아지고 주오일 근무제가 보편화되면서 성냥갑 같은 아파트 대신 전원주택을 찾는 수요가 늘고 있다. 비용이 다소 더 들더라도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곳에서 살고 싶어 하는 수요를 노린 주택업계의 마케팅도 전원주택 열풍의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전원주택은 바로 이런 웰빙(Well-Being) 바람을 타고 새로운 주거문화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기사를 읽는 파주 댁의 목소리에 왠지 흥이 묻어 있었다. 파주 댁의 말소리는 경쾌하였다. 그 소리는 점점 빨라져 창백 옹이 따라 듣기 어려울 정도였다. 별내리의 전원주택 단지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던 며느리의 기쁜 목소리에 창백 옹은 의아했지만 기쁨을 함께 나눈다고 나쁠 것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파주 댁이 읽어주는 기사를 듣던 창백 옹의 입가에는 왠지 모를 미소가 번졌다. 살짝 올라간 입술꼬리를 따라 파뿌리 같은 창백 옹의 수염이 팔 자 모양이 되었다. 공작이 날개를 펴는 것 같이 활짝 핀 흰 수염에 밥알을 동동 띄운 식해의 삭힌 밥풀이 묻어 있었다.
“특히 수도권을 중심으로 불던 전원주택 열풍이 최근에는 지방 대도시 주변으로 확산되고 있다. 대전권에서는 충북 옥천지역에 전원주택 수요자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전과 옥천을 연결하는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접근성이 크게 좋아졌기 때문이다. ……. 한편 옥천군 일대는 무분별한 전원주택개발 탓에 대표적인 난개발 지역이라는 지적도 받고 있다.”
파주 댁은 기사를 읽으며 옥천이라는 단어를 특히 강조하였다. 마치 미스코리아 진을 발표하는 사회자가 외치는 것처럼 극적이고 과장된 목소리였다. 창백 옹은 옥천이라는 단어를 듣자 그 점잖던 몸을 부르르 떤 게 아닐까 할 정도로 뒤척이었다.
“난개발은 무슨, 꼭 저렇게 초를 치는 놈들이 어딜 가나 있단 말이야. 지들이 이곳 사정이나 알고 난개발, 난개발 하는지 모르겠네.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사는 놈들이 꼭 있어. 에잇, 버리지 같은 놈들.”
창백 옹은 기사 막바지에 있던 난개발 운운하는 이들이 마땅치 않은 듯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창백 옹은 옥천이 전원주택지로 인기를 끌면서 류 씨 네 마을의 알짜배기 땅값이 치솟자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양반집안의 체면이 있지 그 속내를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창백 옹의 본심을 알 길 없었던 파주 댁은 시아버지의 심기를 헤아리느라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괴팍한 노인의 마음은 파주 댁의 예측을 빗나 표출될 때가 많았고, 파주 댁은 가시를 돋은 고슴도치처럼 마음을 닫아 노인의 변덕스러움에서 스스로를 지키려 하였다.
덜컹! 덜컹!
충렬당 대문이 짧고 격렬하게 울리었다. 이내 한 중년의 신사가 열린 문틈을 비집고 들어섰다. 오뉴월인데 벌써부터 땀을 삐질 흘리고 있었다. 육중한 몸으로 뻔질나게 충렬당을 드나드는 노심이었다.
노심이 처음 충렬당을 찾은 것은 삼 개월 전이었다. 그가 다녀간 다음 창백 옹의 손에는 여명종합건설 주택사업부장이라는 글씨가 황금색으로 도드라지게 인쇄된 명함이 들려 있었다.
“계셨네요. 오늘 신문 보셨어요? 기사에 한 줄 나갔을 뿐인데 문의전화가 빗발칩니다. 이거 완전 대박인데요.”
노심 부장은 한껏 들뜬 표정으로 전원주택관련 기사를 커버스토리로 다룬 일간지 경제면 섹션을 펴 들었다. 신문을 접어 겨드랑이 사이에 끼어 온 듯, 노심 부장이 신문을 펼치자 나비 모양으로 땀에 젖은 데칼코마니가 흉하게 드러났다.
3.
“아, 이미 보셨군요. 어때요? 사진 잘 나왔죠? 이렇게 찍어 놓으니 별내리도 별천지 같죠?”
노심 부장은 툇마루에 파주 댁의 품 앞에서 펼쳐진 신문을 보며 넉살 좋게 창백 옹 옆자리에 올라앉았다. 파주 댁은 남자들의 대화에 끼지 않으려는 구시대적인 발상을 여전히 미덕으로 내세우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노 부장, 오셨나요? 공연히 시끄럽게 굴지 말고 화전이나 좀 들어요.”
창백 옹은 노심 부장의 인사를 애써 외면하는 듯 말하였다. 새벽부터 서둘러 서울에서 별내리로 떠나오는 터라 아침을 거른 노심은 먹음직스런 화전을 보자 입 안 가득 군침이 절로 돌았다.
그렇지만 창백 옹의 차가운 태도가 마음에 걸려 노심은 화전에 저를 댈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눈칫밥이라면 먹을 만큼 먹은 노심이었다.
‘이거 왠지 분위기가 이상하네.’
노심 부장은 별내리 관련 기사를 신문지면에 싣기 위하여 밤늦게까지 강남의 한정식집과 비즈니스 클럽을 부나비처럼 떠돈 자신의 공을 자랑하고 싶었다. 그런 공을 눈치 채지 못하는 창백 옹이 원망스럽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실망할 일도 아니었다. 시골 노인의 치하 따위가 없어도 일은 잘 되어가고 있었다. 노심 부장의 인사고가 점수는 높아질 것이었다.
잠시 눈치를 살핀 노심 부장은 이내 과장된 목소리로 날씨 이야기, 건강 이야기로 창백 옹의 기분을 맞추려 애를 썼다. 그 순간에도 노심은 화전 한 입 맛보려는 원초적 본능에 충실하게 젓가락을 들었다 놨다, 화전이 담긴 알루미늄 쟁반을 만지작거렸다. 전 위에 놓인 고명을 닮은 꽃무늬가 인쇄된 쟁반에 화전을 담아내는 파주 댁의 센스는 그럴 듯했지만 볼품은 별로 없었다.
“이보게 노 부장, 아무래도 안 되겠네.”
“무슨 말씀인지?”
“계약, 없던 걸로 함세. 내 계약금의 세 배를 배상하겠네.”
“네?”
“자식 놈들이 너무 성화를 부려 뒷감당이 도저히 안 되는 군. 자네가 좀 이해해 주게.”
창백 옹은 노심 부장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말을 꺼냈다. 충렬당과 주변 옥답, 야산을 팔겠다며 계약금까지 받아 놓고 이제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단다. 창백 옹은 핏줄이 불끈 솟은 얇은 팔을 움직여 화전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꼼꼼히 입을 움직였다. 화전에 묻은 검붉은 간장소스가 한 방울 흘러 창백 옹의 새하얀 수염을 갈색으로 물들였다.
노심 부장의 웃음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하니 있던 노심 부장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노심은 마른 침만 꼴깍 삼켰다. 그는 화전을 오물거리는 창백 옹의 입을 콱 쥐어박고 싶었다. 노심 부장은 밥알로 장식하고, 간장으로 브리지 염색한 노인의 흰 수염을 확 뽑아버리고 싶었다.
“내 알아봤네. 계약을 파기하면 계약금의 세 배 정도만 내면 된다고 하더군. 우리도 경제적 손해가 이만저만 아니지만 선조가 물려준 땅과 집을 내 대에 파는 게 영 내키지 않아서 말이야. 어쩔 수 없었네.”
“아니 영감님, 이제 와서 무슨 말씀입니까?”
노심 부장은 분을 삭이며 조용히 말을 하였다. 창백 옹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러시면 저희 회사는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기사 내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벌써 가계약 받아 놓은 것도 있는데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
“저 좀 살려주세요.”
노심 부장은 창백 옹 앞에 털썩 주저앉으며 하소연을 하였다. 하지만 창백 옹의 시선은 여전히 딴 곳을 향하고 있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을 것 같았다.
옥신각신. 노심 부장은 필사적으로 창백 옹에게 매달렸다. 빌고 또 빌었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노심 부장의 인내력이 점점 한계에 달하였다.
씩씩 거리며 노기를 참는 노심 부장과 이를 차갑게 무시하는 창백 옹의 표정은 극명히 대조되었다. 노심의 불그스레하던 얼굴이 핏기 없이 새하얗게 바뀌어 갔다. 그럴수록 창백 옹은 근엄한 표정을 짓기 위하여 안면근육에 힘을 주어 얼굴은 붉게 물들어갔다.
노심 부장은 어떻게 해서라도 계약을 마무리해야만 하였다. 이렇게 계약이 파기되면 회사는 큰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노심 부장의 간당간당했던 일자리가 한 순간에 사라질 것이 뻔하였다.
자신의 운명이 시골의 벽창호 늙은이에게 달렸다고 생각하니 노심의 피는 불처럼 끓어올랐다. 거칠기로 유명한 부동산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노심 부장이었다. 노심도 본 게 있었다. 회유가 안 된다면 협박이었다. 협박에도 단계가 있었다.
“영감님, 이러시면 재미없습니다.”
“이미 계약서에 도장까지 찍은 마당에 저희가 가만히 있을 것 같습니까?”
“법정까지 가서 어디 한 번 끝까지 해볼 랍니까?”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노심은 시골 노인들에게 명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법적 대응을 들고 나섰다. 그것으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하지만 노심의 협박은 방백일 뿐이었다. 그의 협박은 어설펐다. 그의 협박은 좀 더 차갑고 냉정하게 거침이 없어야 하였다. 그렇지만 노심의 양심이 그러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시게. 얘기 끝났으면 가보시게.”
노심 부장도 짚이는 게 있었다. 그도 류 씨 네 마을 전원주택 사업을 두고 경쟁을 벌이던 청하건설산업이 충렬당 창백 옹을 휘두르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바 있었다. 실은 노심 부장이 신문기사를 준비하고, 창백 옹을 서둘러 만나러 충렬당을 찾은 것도 그 일 때문이었다.
‘분명 청하건설산업 놈들이 이 영감탱이를 구워삶았구나. 이거 일이 참 더럽게 됐네.’
‘걱정할 것 없어. 계약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으니 아직 승산은 있어.’
노심 부장의 머릿속은 복잡하였다. 노심은 마음을 다잡고 다음 단계의 협박을 준비하였다. 노심 부장은 애써 표정을 싹 바꾸었다.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양복 상의를 과격하게 벗어재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외딴 시골의 노인과 한 판 몸싸움이라도 불사할 것 같은 각오를 몸으로 표출하였다. 창백 옹은 그런 노심의 모습을 보며 몽둥이를 든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며 이빨을 거세게 드러내는 똥개의 그것과 닮았다고 생각하였다.
“에이 씨 팔, 짜증나서 못해 먹겠네.”
노심 부장은 침을 탁하고 뱉으며 충렬당 툇마루 밑에 있던 대야를 한 발길로 내다 찼다. 쨍그랑. 깨지지 않는 스텐 대야가 요란하게 울렸다.
“네 이놈, 이게 무슨 경우 없는 짓인가?”
창백 옹이 벌컥 화를 냈다.
노심 부장도 더 참을 수 없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대로 돌아가면 당장 사표를 내야할 판이었다. 길거리에 나앉을 처자식의 얼굴이 노심 부장의 머릿속에 스치자 노심은 서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의도적으로 화를 냈지만 노심은 점점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수 없었다.
4.
“뭐? 경우 없다고? 씨 팔.”
“느닷없이 계약을 깨려는 당신이 더 경우 없는 거 아니야? 씨 팔.”
“늙은이가 노망났나? 왜 이래? 씨 팔.”
노심 부장은 창백 옹에게 ‘씨 팔’을 속사포처럼 쏘아 부었다. 그렇지만 노심이 차마 늙은이의 멱살잡이까지는 못하고 있을 때였다.
번쩍! 노심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창백 옹이 노기충천한 모습으로 싸대기를 후려쳤던 것이었다. 이어 창백 옹은 차가운 표정으로 툇마루 기둥에 걸려있던 대소쿠리를 노심에게 집어 던졌다. 창백 옹의 노익장 과시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싸리비를 들고는 휘두르기 시작하였다.
“네, 네.” 하며 왕처럼 자신을 떠받들던 류 씨 네 마을 사람들만 상대하던 창백 옹의 습관 그대로였다.
싸리비의 싸늘한 감촉이 노심 부장의 얼굴을 스쳐지나갔다. ‘툭’하고 노심 부장의 안경이 떨어졌다. 기름을 묻혀 가지런히 다듬은 이대팔 가리마는 무참히 헝클어졌다. 까슬까슬한 싸리비의 감촉이 노심이 삭이려 애쓰던 분노의 끓는점을 한껏 높여놓았다.
“당신, 미쳤어?”
노심은 창백 옹을 향해 돌진하였다. 하마 같은 육중한 몸은 멧돼지처럼 맹렬하였다. 평정심을 잃은 남자의 행동은 돌발적이었다.
창백 옹은 깜짝 놀랐다. 류 씨 네 마을 주민 그 누구도 자신에게 그렇게 거칠게 반항하지 않았다. 노심의 행동은 창백 옹의 예측범위 밖이었다. 창백 옹은 당황하였다. 겁이 났다. 창백 옹은 주춤거릴 틈도 없이 몸을 돌려 피하려 했지만 낡디 낡은 늙은이의 관절은 생각만큼 말을 듣지 않았다.
‘쿵’하고 창백 옹은 뒷걸음질 치다 소쿠리에 걸려 넘어졌다. ‘퍽’하고 엉덩방아 찧은 창백 옹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뒤로 자빠졌다. 외출용으로 모셔 둔 노인의 갈색 구두가 가지런히 올려 있는 화강석 디딤돌에 창백 옹은 머리를 박은 채 쓰러졌다. 피였다. 피가 흘렀다. 거품이었다. 창백 옹은 입에 살짝 거품까지 물며 쓰러졌다.
‘어쩌지, 저 영감탱이 죽은 거야?’
‘설마 그렇게 넘어졌다고 죽는단 말이야?’
‘손끝하나 댄 적도 없는데. 정당방위야.’
‘아냐, 무리야.’
‘파주 댁이 싸우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 그녀도 죽여 버릴까?’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노심 부장의 몸은 얼음처럼 굳어져 버렸다. 노심 부장의 뇌는 활화산처럼 뜨거웠다. 짧은 시간이지만 참 많은 생각들이 노심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노심 부장은 도망가고 싶었다. 차마 그러지 못하였다.
그때까지도 노심은 인간이었다. 일이 어찌되든 영감의 안녕부터 살피어야하였다. 노심은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긴장 속에 싸리비처럼 뻣뻣하게 쓰러진 창백 옹에게 다가갔다. 장기를 태울 것 같이 들끓던 노심의 피는 심장을 얼릴 듯 차가워졌다.
‘큰일이다!’
창백 옹의 맥이 짚이지 않았다. 노심은 영감의 가슴에 귀를 대어 심장소리를 들으려 애썼지만 늙은 심장은 더 이상 뛰지 않았다. 손가락에 침을 묻혀 창백 옹의 콧구멍에 대봐도 공기가 드나드는 서늘함을 느낄 수 없었다.
두려움도 두려움이었지만 노심 부장은 억울한 생각이 앞섰다. 소리 좀 질렀다고 살인자가 되어야할 판이니 미칠 것 같았다. 어떻게든 위기에서 벗어나야 하였다.
노심은 한 시 바삐 충렬당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말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무작정 떠난다고 일이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문제는 파주 댁이었다. 현장을 보지 않고 소리만 들은 파주 댁은 결코 노심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지 않을 것이었다. 설사 노심이 창백 옹에게 겁만 주려했던 장면을 파주 댁이 보았다하더라도 그녀가 가족의 편이 될 것은 너무도 자명하였다.
‘파주 댁만 없애면 되는 거야!’
노심 부장의 생각은 찰나였다. 창백 옹의 죽음을 확인한 그의 몸은 반사적으로 부엌으로 향하였다. 어서 빨리 파주 댁을 찾아야 하였다.
“우당탕탕.”
스텐 대야가 발에 걸려 요란한 소리를 냈다. 노심이 조금 전 창백 옹을 겁주려 했을 때만해도 스텐 대야의 쨍그랑 소리가 작은 게 불만이었다. 하지만 그 소리가 이젠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천둥소리는 노심의 혼을 홀딱 빼 놓았다. 혼이 달아난 만큼, 노심은 허우적거렸지만 재빨랐다. 그저 흥분에 겨워 무의식중에 흉기를 찾았다. 그는 부엌으로 가는 도중 기둥에 걸려있던 낫을 집어 들었다.
극도의 흥분은 감정 조절을 담당하는 변압기마저도 고장을 내었다. 노심의 시야는 온통 뿌옇게 흐려졌다. 오직 한 곳 부엌문만 더욱 선명하게 그려졌다. 노심의 촉감도 마찬가지였다.
뺨 맞은 후끈거림과 싸리비에 쓸린 상처의 쓰라림은 더 이상 없었다. 하지만 노심은 낫자루를 잡은 촉촉한 손바닥을 통하여 먼지와 타액으로 섞인 거미줄의 미세한 끈적임을 느낄 수 있었다.
노심의 발걸음이 충렬당의 부엌 앞에 닿았다. 여닫이 부엌문은 닫혀있었다. 잠시 심호흡을 한 노심은 힘껏 문을 열어 재꼈다. 이판사판이었다. 대낮이었지만 부엌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솥이며 그릇 등의 가재도구가 각자의 자리에 깔끔하게 포개져 있었다. 파주 댁의 정갈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시골 부엌의 퀴퀴한 냄새는 파주 댁도 어쩔 수 없었다.
노심의 시선은 한 곳에 머물지 못하였다. 유리구슬을 통화하여 불규칙하게 산란되는 빛처럼 노심의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렸다. 순간 노심 부장의 시선은 한 곳을 향하였다. 시선의 끝에는 파주 댁이 있었다. 파주 댁의 움직임을 쫓는 노심의 시선은 한참 동안 고정되어 있었다. 노심은 자신의 시선이 고정된 곳으로 다가갔다.
파주 댁이 부엌 식탁에 머리를 박은 채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파주 댁 옆에는 식해를 담아 마신 듯 밥알이 남아 있는 빈 컵이 쓰러져 있었다. 한적한 별내리의 외딴 집, 충렬당은 적막하였다. 새소리, 벌레소리 마저 없었다. 평소엔 들리지 않던 ‘삐~’하는 고주파의 소리가 노심의 귓속을 때렸다.
‘이 여자, 지금 낮잠이라도 자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바깥이 그렇게 소란스러웠는데 파주 댁이 이렇게 태평스레 잠을 잘 리 만무하였다. 노심 부장은 파주 댁 옆으로 좀 더 가까이 조심스레 걸어갔다. 파주 댁이 무슨 수작이라도 부리는 게 아닌지 경계하면서.
5.
용기를 내었다. 노심은 파주 댁의 어깨에 손을 대어 흔들었다. ‘털썩’하고 파주 댁은 힘없이 식탁의자에서 나가 떨어졌다. 파주 댁의 얼굴이 허공을 향하였다. 파주 댁의 창백한 얼굴은 희다 못해 혈관의 푸른빛이 낯에 비쳐 푸르렀다.
거품이었다. 파주 댁의 입가에 보글보글 거품이 뭉쳐 있었다. 창백 옹의 입에서 보았던 그런 거품이었다. 노심 부장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파주 댁의 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숨을 거둔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파주 댁의 체온은 따뜻하였다.
노심 부장은 두려웠다. 들고 있던 낫을 떨어뜨릴 뻔하였다. 창백 옹의 죽음은 그렇다 치더라도 파주 댁은 왜 죽어있는 것인지 노심 부장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뭐야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 여자 간질 발작이라도 했던 거야?’
***
달리고 달렸다. 노심은 미친 듯이 차를 내 몰았다. 목적지는 대전 시내였다. 일단 사람들이 북적여 익명이 보장되는 곳으로 몸을 숨긴 뒤, 상황을 정리해 보기로 노심은 마음먹었다.
‘파주 댁은 이미 죽어 있었다. 창백 옹도 파주 댁과 같은 증상을 보이며 죽었다. 그렇다면 내가 그들을 죽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럼 누가 왜 어떻게 죽인거지?’
‘큰일이다. 죄를 뒤집어쓰게 생겼어. 이럴 줄 알았으면 창백 옹의 상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볼걸 그랬어.’
온갖 생각이 노심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갖은 후회가 노심의 뇌를 스쳤다.
얼마나 달렸을까? 자신도 알지 못하는 길을 헤매고 있었다. 노심은 고속도로를 피해 낯선 지방도로를 이용하였다. 고속도로 요금소에 있는 폐쇄회로 감시카메라에 노심의 차가 찍혀 이동경로를 추적당할 것을 우려하여서였다. 대전 중심부, 은행동을 목적지로 설정한 내비게이션은 끊임없이 경로이탈 경고음과 함께 새로운 경로를 재탐색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이 찾아낸 새로운 경로는 역시 고속도로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노심은 첨단 위성항법장치의 도움 없이 고독하게 숨을 곳을 찾아 방황하고 있었다. 고속도로를 타고 류 씨 네 마을에 올 때만 해도 사십 분 남짓 걸렸는데 국도로 돌아가니 벌써 두 시간이 지났다. 고속도로가 생기기전 류 씨 네 마을은 그야말로 오지였다.
“삐뽀, 삐뽀”
어느 샌가 경찰차가 경광등을 울리며 빠른 속도로 노심의 차에 따라 붙고 있었다. 노심은 겁이 났다. 이렇게 잡히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경찰이 충렬당 사건을 확인하고 자신을 용의자로 지목했을 가능성은 낮았다. 노심은 심호흡을 하며 차의 속도를 줄였다. 경찰차의 목표가 자신이 아닌 다른 곳에 있기를 바라면서 태연한 척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육*사번 차 세우세요. 이육*사번 옆으로 차를 대세요.”
경찰은 어김없이 노심의 차를 불러 세웠다. 내심의 기대가 무너졌다. 노심은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달아날까, 태연하게 검문에 응할까 노심은 고민하였다. 노심은 달아날 자신이 없었다.
노심은 마음이 바빴다. 조수석에는 충렬당에서 가져온 낫이며 화전이 담긴 쟁반이며 젓가락이 양복 상의에 싸여 너부러져 있었다. 충렬당에서 도망쳐 나올 때, 노심은 자신의 지문이 묻은 물건들을 처리할 심산으로 낫, 쟁반 등을 급한 데로 양복 상의에 말아 차에 던져두었다.
충렬당에서 노심은 지문을 지우거나 할 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적당한 곳에서 파묻을 요량이었다. 노심의 죄를 증명할 결정적 증거가 될 수도 있는 물건들이었다. 노심은 위험한 그것들을 치우려 허둥대고 있었다.
순식간에 경찰이 차 옆까지 와 문을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어이쿠, 이거 과속하셨네요. 운전면허증 좀 주시죠.”
조롱조였다. 경찰은 건들거리며 실실 웃고 있었다. 그는 다 찌그러져 가는 노심 부장의 오래된 경차를 경멸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경찰은 교과서에서 보던 모범적인 경찰의 모습이 아니었다. 썩을 대로 썩은 저질 경찰과의 조우, 그날은 확실히 노심에게 운수 없는 날이었나 보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면허증이 든 지갑이 양복 윗도리 안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자칫 경찰관이 낫과 화전에 관심을 보이기라도 한다면 낭패였다. 다행히 경찰관은 차 안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연한 척 양복 윗도리를 들추며 지갑을 찾던 노심 부장은 그만 낫에 손가락을 베이고 말았다. 그래도 노심은 애써 자연스레 행동하려 하였다. 피를 흘리며 지갑에서 운전면허증을 꺼내 경찰에 내밀었다.
“이봐요 피가 나잖소. 괜찮소? 안색도 안 좋네. 무슨 일 있으신가?”
경찰은 노심을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며 말하였다. 당황해 어눌한 목소리, 낫에 베여 피 흘리는 손, 삐질 식은땀을 흘리는 누렇게 뜬 안색 등 노심의 상태는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아니, 괘 괜찮습니다. 수 수고들 많으십니다.”
“그래요? 원래는 과속딱지 끊어야 하지만 선생 사정을 보니 딱하기도 하고 뭐 그래서….”
경찰은 노심의 차와 노심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노심은 그 경찰이 무엇을 원하는지 감을 잡았다. 서울 번호판을 단 차에다 넋을 잃은 운전자, 그야말로 제대로 된 먹잇감이었다.
노심은 베여 쓰라린 손을 다시 움직여 지갑에서 이만 원을 집었다. 그 돈을 노심은 경찰이 들고 있는 면허증 밑에 꽂아 넣었다. 민중의 지팡이, 경찰의 얼굴에 똥칠하는 당치않은 악덕 경찰관의 태도에 부아가 치밀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노심은 일단 자신의 위치가 노출됐으니 어서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경찰관이 돌아가자 노심은 시동을 걸었다. 깊은 숨을 들이쉬며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노심은 왼발, 오른발을 각각 클러치와 브레이크를 밟으며 핸드브레이크를 풀었다.
노심이 왼발을 클러치에서 살살 떼면서 오른발을 브레이크에서 엑셀로 옮겨 놓으려는 순간, 뒤에서 그 악덕경찰이 빵빵하고 경적을 울렸다. 시동이 벌컥 꺼졌다. 노심이 후사경을 통해 뒤를 보자 경찰관이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제대로 들리지 않아 노심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악덕 경찰이 무슨 행패를 더 부릴지 몰라 애써 무시하였다. 그러자 경찰관이 노심 쪽으로 다시 걸어왔다.
‘저 놈 또 무슨 일이래. 완전 저질 악덕 양아치 녀석이잖아.’
노심이 씩씩 거렸다.
“이봐, 차 안에서 연기가 나잖아. 대체 무슨 일이야?”
그러고 보니 뒷좌석 모직시트에서 하얀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나고 있었다. 노심은 정신 놓고 있다가 담배를 떨어뜨린 줄을, 그 담배가 시트에 붙어 연기를 뿜으며 곧 큰 불을 내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였다.
노심은 조수석 양복 상의를 빼 담뱃불이 붙은 시트를 미친 듯이 두드렸다. 경찰관은 노심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악덕 경찰관 덕에 노심은 쉽게 불길을 제압할 수 있었고 목숨도 부지할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허둥지둥 노심은 악덕 경찰관에서 인사를 하였다.
“잠깐, 저건 뭐요?”
6.
경찰관은 노심의 양복 상의가 치워진 조수석을 가리켰다. 노심은 아차 싶었다. 아무래도 차에 낫이 있는 게 영 어색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노심의 얼굴은 더 노랗게 떴다. 이마의 식은땀은 제법 굵어졌다.
“벌초하고 가는 길인데 낫을 챙기다보니 어쩌다 조수석에 놓게 됐네요.”
“아니, 저 쟁반에 담긴 먹음직스럽게 생긴 것 말이요.”
신기한 일이었다. 그 소란에도 충렬당 파주 댁이 만든 화전은 고스란히 쟁반에 담겨 있었다. 여태 아무것도 먹지 못한 노심에게도 그 화전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아, 이거 화전이요. 집사람이 간식으로 먹으라고 싸 줬어요.”
“그렇군, 화전이었어.”
경찰관은 노심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화전을 한 줌 집어 들더니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이번에도 노심은 군침만 흘리며 경찰관의 입에 들어가는 화전을 쳐다봤다.
“정신없는 양반, 운전 조심해서 들어가요. 그러다 사고 나겠소.”
저질 악덕 경찰관은 다시 차로 돌아갔고 상황은 정리되었다. 이제 어딘가에 차를 버리고 숨는 일만 남았다. 노심이 생각해도 한심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제대로 도망치지도 못하는 어설픈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노심은 바로 떠나고 싶었지만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한 동안 차를 세워 둔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경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아마 그 악덕 경찰관이 한 줌 가득 집어간 화전을 다 먹고 다음 먹잇감을 찾으러 나서는 길일 터였다.
“끼이익, 끼이익.”
그런데 경찰차의 움직임이 이상하였다. 차 한 대 다니지 않아 한적한 시골 국도에서 경찰차는 곡예운전을 하며 비틀거렸다.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
이내 경찰차는 심하게 흔들리며 가로수를 정면으로 들이받고 서버렸다. 그리 큰 충돌은 아니었다. 아마 곧 정신을 차리고 사고를 수습할 것이라고 노심은 생각하였다.
노심은 무의식적으로 차를 몰아 달아나려 하였다. 노심의 차가 경찰차를 스쳐 지나는 순간 노심의 눈에 악덕 경찰관이 이마에 피를 흘린 채 운전석 창문에 기대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양심상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어쩌면 경찰관이 어떻게 됐는지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이었을지 몰랐다. 노심은 차를 세웠다. 조심스레 경찰차에 다가갔다.
사필귀정. 악덕 경찰은 입에 거품을 물고 죽어 있었다. 노심 부장에게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화전이 문제였다. 화전을 먹은 사람은 모두 입에 거품을 물고 죽었다. 창백 옹이 그랬고 악덕 경찰관도 그랬다. 아마 파주 댁도 부엌에서 화전을 먹었을 것이었다.
희비가 교차하였다. 이것으로 노심은 자신이 무죄임을 확신하였다. 화전이 주범이라는 것. 그렇지만 아직도 자신은 유력한 살인사건 용의자다. 게다가 이렇게 경찰관까지 죽었으니 진실을 밝히지 않으면 노심에게 미래는 없었다.
뜻밖의 수확도 있었다. 노심은 살인의 도구와 방법을 알아냈다. 화전에 독극물이 들어 있었음이 확실하였다. 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화전에 독극물을 넣을 수 있단 말인가? 요리를 직접 한 파주 댁마저도 모르게 독극물을 넣는다는 것은 힘든 일인데 말이다. 노심은 한 가지를 더 생각해 냈다.
‘악덕 경찰을 만난 덕에 신분조회를 면할 수 있었네. 내가 죽은 경찰관과 함께 있었다는 어떤 흔적도 없으니 천만 다행이다. 하지만 충렬당 살인사건과 악덕 경찰관의 사인에 공통점이 있으니 날 용의자로 지목하겠군. 두 사건을 조합할 동안의 시간 정도는 벌 수 있겠구나.’
그 길로 노심은 대전 시내까지 차를 조심스레 달렸다. 다행스럽게도 노심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띌 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전에 접어들자 노심의 차는 퇴근길 석양 속으로 밀려는 자동차들 사이에 파묻힐 수 있었다.
희한하게도 인파에 묻혀 있으면 마음이 편하였다. 어깨를 툭 쳐도 ‘미안’이라는 말 한마디면 어느 누구하나 노심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노심은 대전 중심에서 살짝 비껴난 은행동의 한 모텔에 자리를 잡았다.
일단 안심이 되자 노심은 자신의 처지가 서글펐다. 생각을 차분하게 정리해야만 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누군가 옆에 있었으면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을 건만. 그러자 노심에게 가족의 얼굴이 떠올랐다. 집에 전화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참아야 하였다.
그는 모텔방 안에서 꼼짝하지 않고 텔레비전 뉴스채널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세상은 생각만큼 떠들썩하지는 않았다. 충렬당 사건은 지상파 방송국의 저녁 아홉시 뉴스에서는 언급도 되지 않았다.
이십사 시간 뉴스전문 방송에서만 “충북 옥천에서 칠십대 남성과 삼십대 여성이 숨진 채로 발견됐다”며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고 경찰은 독극물에 의한 사망으로 추정하고 있다”는 소식을 짤막하게 전하였다. 그 뉴스마저도 구체적인 지역과 용의자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관할 경찰 간 공조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듯 하였다. 악덕 경찰관 사망사건 소식은 별내리의 충렬당 살인사건과는 별개로 다뤄졌다. 뉴스에서는 아직도 경찰관 살해사건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공개수배 전단이 뿌려지고 텔레비전에 자신의 얼굴이 용의자로 비춰질 것이라는 노심의 생각은 기우였던가 보다.
노심은 스스로 경찰을 찾아가 결백을 주장할까 수 없이 고민하였다. 하지만 몇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경찰이 노심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어줄지 자신이 없었다. 자칫 구속수사라도 받게 된다면 노심의 운명은 경찰의 손에 맡겨지는 셈이었다.
무엇보다 악덕 경찰 사망사건과 연계되면 일은 어떻게 꼬일지 장담할 수 없었다. 결국 고민의 끝은 자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숨어 지낼 수도 없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직접 누명을 벗는 수밖에 없다.’
생각은 그렇게 쉽게 정리됐지만 누가 진범인지 어떻게 찾을지 노심은 망막하였다. 수사를 해 본 적도 없었다. 살인이라는 말조차도 자신과는 무관한 소설 속의 단어인 줄만 알고 살았다. 그날 노심은 밤을 새워 앞으로의 일들을 계획하였다. 인생이 걸린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에 노심은 심혈을 다하였다.
***
다음 날, 대전구장은 한화 이글스의 연승행진을 만끽하러 온 일만여 관중으로 가득 찼다. 노심이 있는 은행동 모텔에서 걸어 이십 분 걸리는 대전구장까지 단 오 분 만에 걸어갔다. 노심은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다.
이날 경기는 스포츠 전문 케이블채널에서 방송중계를 하는 모양이었다. 경기 시작 전 시험방송을 하는 얄미운 카메라맨은 틈틈이 관중석의 모습을 화면에 담아내고 있었다. 커다란 외야석 전광판에 노심의 모습이 살짝이라도 비칠 때면 노심의 간은 두 근 반 세 근 반이었다.
‘어쩌자고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한 거야. 녀석 전문가가 맞는 거야. 근데 왜 약속시간이 다되어 가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거지. 설마 녀석이 경찰에 신고라도 한 건 아닐까?’
노심은 점점 조급해졌다. 노심의 돌핀 전자시계는 오후 세시 오십분을 막 지나고 있었다. 어젯밤 노심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도와달라며 자신의 사정을 말한 게 후회되었다.
7.
노심은 자신과 몇 번 술잔을 기울인 적이 있는 여명종합건설 법무팀 박철민 과장에게 도움을 청했었다. 말이 좋아 법무팀이지, 사실 그 부서는 불량채권을 회수하는 일을 하는 곳이었다. 박 과장은 일명 채권추심업무를 담당하였다.
여명종합건설은 중견기업답게 대개는 소액재판, 가압류 등 법조항을 무기로 품위 있는 빚 독촉을 하였다. 물론 음으로는 협박, 회유 등 더러운 짓도 서슴지 않았다. 박철민 과장이 바로 음지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박철민은 대전의 한 경찰서 형사출신이라고 했었다. 그는 무슨 이유인지 불명예 퇴직한 후 몇 년간 방황하다 흘러 흘러 여명종합건설에 입사하였다.
“형님, 제가 개 같은 성격을 이기지 못하고 한 놈을 죽도로 팼는데요. 그놈의 줄이 꽤 튼튼한 거였나 봅디다. 세상 참 더러워서. … 먹고 살려면 일 해야죠. 제가 뭐 할 줄 아는 게 이런 거라서.”
입사 첫날 회식자리에서 박철민 과장은 노심 부장에게 서슴없이 말했었다. 소심한 노심은 초면에 대놓고 형님하며 속내를 드러내는 철민이 낯설었다. 철민의 짧은 머리와 시꺼먼 가죽 재킷이 위압적이었다.
어젯밤, 노심은 궁리 끝에 철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아가씨들의 웃음소리, 술집에서 흥청이던 철민은 ‘아니 형님, 이 시간에 웬일로 전화를 다 주십니까?’라며 꼬인 말로 전화를 받았다. 새벽 세시 조금 안된 시각이었다.
노심의 두서없는 이야기가 계속되자 북적이던 노랫소리와 깔깔거림이 사라졌다. 철민의 목소리도 점점 차분해졌다. 노심도 뭐라고 했는지 정리가 안 되는 이야기가 끝났을 때 비로소 철민이 말을 꺼냈다.
“형님, 전 형님 믿어요. 제가 시키는 대로만 하세요.”
박 과장의 마지막 말을 들을 때 노심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런 철민이 일러준 대로 대전야구장 관중석에 앉아 있는 노심은 불안하였다.
술에 취한 녀석에게, 잘 알지도 못하는 녀석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겨도 될까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하였다. 노심은 주변을 둘러봤다.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주변에 건장한 남성들이 모여 들었다. 그자들이 힐끔 힐끔 노심을 살피는 것 같았다. 영화에서 보았던 형사들 이미지 그대로였다.
‘에잇, 나쁜 놈. 날 경찰에 팔아 넘겨? 그래서 네가 경찰에 복직이라도 할 요량인가?’
노심은 부아가 치밀었다.
‘달아나야 하나? 박 과장을 믿고 기다려야 하나?’
어제부터 노심에게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결국 노심은 눈치를 보다 자리를 박차고 달아날 요량으로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그 때 누군가가 뒷자리에서 노심의 어깨를 잡아 꾹 눌렀다. 노심은 가슴이 철렁하였다.
‘이렇게 허무하게 잡히고 마는 구나!’
“형님, 지금 움직이면 안 돼요. 전광판 봐요. 카메라가 돌고 있잖아요. 일어서면 눈에 띈단 말이에요.”
박철민이 노심의 귀에다 소곤거렸다. 중계카메라가 마침 노심이 있는 관중석을 비추고 있었다. 카메라는 이내 야구선수들이 도열해 애국가를 부르고 있는 장면을 잡았다.
“아, 박 과장. 깜짝 놀랐잖아요.”
노심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철민에게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앙탈을 부렸다.
“형님, 벌써 놀라면 안 되죠. 이제부터 진짜 놀랄 일이 일어날 텐데요.”
철민은 애국가가 끝나고 선수들이 파이팅을 외치는 순간, 관중석에서 울려 퍼진 함성과 함께 호탕하게 웃어 제겼다. 철민의 시꺼먼 얼굴에 새하얀 이가 도드라졌다.
“…….”
한참이 지났다. 드디어 홈팀 한화 이글스의 일회 초 수비가 시작되었다. 선발투수 송진우는 노익장을 과시하며 첫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냈다. 개인통상 이천 탈삼진을 축하하는 응원가가 흥을 돋웠다.
“송진우, 송진우! 회장님, 회장님!”
관중들은 여전히 송진우 선수가 프로야구 선수협회 회장을 맡았던 일을 기억하며 송진우와 회장님을 연호하였다. 철민도 고래고래 회장님을 외쳐댔다.
한동안 철민은 노심을 잊은 채 야구에만 집중하였다. 노심은 초조했지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철민에게 생각이 있어서일 거야라고 노심은 불안한 마음을 다잡았다. 십년 같은 십 분이 지나고 철민이 노심에게 반가운 지령을 내렸다.
“형님, 이제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죠.”
노심은 철민을 쫓아 대전구장 밖에 마련된 공원 한 켠 벤치로 향하였다. 철민은 그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알아왔다. 그 새벽에 철민은 대전으로 내려와 밤샘 근무를 하고 있는 옛 동료들로부터 충렬당 살인사건의 사인에 대한 자료를 얻어왔다.
철민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충렬당 파주 댁은 파라콰트 복용으로 사망하였다. 또 창백 옹에서는 파라콰트와 마릭스 성분이 함께 검출되었다. 또 하나, 비슷한 증상으로 죽은 경찰관은 마릭스 복용으로 인한 신체기능 저하로 차량을 통제하지 못하고 가로수와 정면충돌해 사망하였다.
파라콰트나 마릭스는 제초제로 쓰이는 농약으로, 사람이 복용하면 치명적인 독약이기도 하였다. 철민은 경찰에서 노심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하였다.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노심은 시무룩해졌다.
“세 사람이 복용한 게 다 틀리다는 말인가요? 모두가 같은 화전을 먹고 죽었는데 어떻게 검출된 성분이 다르죠?”
노심이 철민에게 물었다. 모두 화전을 먹고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세 사람의 사인은 각각 달랐다.
“아직 몰라요. 경찰은 피해자들이 어떻게 독을 먹었는지도 모르고 있어요. 경찰에서 화전 이야기는 없었어요. 우리가 정보력에선 우위에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죠.”
“이제 어떻게 하죠?”
“그 전에 더 들으셔야 할 게 있어요. 경찰 후배들 만나고서 바로 충렬당에 다녀왔어요. 마을 사람 몇몇을 만나고 왔는데 창백 옹의 아들, 그러니까 파주 댁의 남편인 류근백이 대전에서 종묘상회를 운영하고 있다네요. 아무래도 그라면 맹독성 농약을 구하기 쉽지 않을까요?”
철민은 손 때 묻은 수첩을 유심히 들여 보며 말하였다.
“아, 창백 옹이 죽으면 충렬당은 아들이 상속하니 대규모 전원주택 개발이익을 류근백이 독차지 할 수 있겠네요.”
“그렇죠, 더군다나 류근백에게 내연녀가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니까요. 마을에서 류근백의 바람기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어요.”
“그럼, 부인까지 죽일 동기가 되겠네요. 하지만 농약이라는 게 농촌에선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거잖아요.”
간단한 추론이었지만 노심은 스스로가 대견하였다.
8.
“그건 그렇지요. 하지만 창백 옹과 파주 댁이 먹은 독극물인 파라콰타의 경우, 농약상품일 때는 보통 초록색을 띠는 데다 역한 냄새까지 나죠. 그 상태로는 피해자들에게 몰래 먹일 수 없어요. 피해자들은 아마 무색, 무미, 무취한 원액을 마셨을 가능성이 커요. 파라콰타 원액은 보통 사람이 구하기 쉬운 물건이 아니죠. 종묘상이라면 가능하겠죠?”
“정말 그러네요. 파라콰타가 액체라면 화전 반죽을 만들 때 그것을 첨가하였다는 건가요?”
“아뇨, 파라콰타를 아마 물에 타서 먹였을 거예요. 아무리 무색, 무취라지만 파라콰타 원액은 직접 손에 닿는 것만으로도 중독되는 치명적인 농약이거든요.”
“그러고 보니 충렬당에는 화전 말고 식해도 있었어요.”
노심이 철민의 이야기를 듣다가 식해의 존재를 떠올렸다. 노심은 철민이 하룻밤 사이 그 많은 사실을 조사하고, 구체적인 추리까지 해내는 게 대단하게 느껴졌다.
“역시 그랬군요. 식해라면 강한 단맛이 있으니 독약을 숨기기 용이했겠군요. 그렇다면 화전에는 마릭스가 들었을 거예요. 마릭스는 하얀 가루로 밀가루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예요. 물론 마릭스 가루에도 구토를 일으키는 향이 첨가되는데 포장을 뜯고 오래두면 향이 약해지죠. 아마 마릭스를 밀가루에 섞어 화전을 만들었을 거예요.”
“어떻게 그런 일이. 아무리 돈이 좋다고 해도 가족에게 독약을 먹일 생각을 하다니.”
노심은 자신의 처지를 잊은 채 류근백의 인간 이하의 짓에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철민이 나섰다.
“정리하면, 류근백이 식해에 파라콰타 원액을 탔고, 밀가루에 마릭스를 섞어 두었다는 이야기가 되네요. 아마 파주 댁이 창백 옹과 여느 때처럼 화전이며 식해를 나눠 먹을 줄 알았던 거겠죠. 물론 가설이지만 말이에요. 그런데 무슨 이유엔가 창백 옹은 식해와 화전을 모두 먹었고, 파주 댁은 식해만 마셨다는 추론이 가능하죠. 그리고 숨진 경찰관은 형님이 말씀하신대로 화전만 먹었고. 그럼 각각의 중독 원인은 밝혀진 거네요.”
노심은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 철민이 곁에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하였다.
“그럼 이젠 어떻게 하죠?”
“류근백을 만나러 가야죠. 시간이 별로 없어요.”
철민은 자리를 털며 일어났다. 노심도 철민을 따라 나섰다. 그러다 노심이 궁금해 미칠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하였다.
“근데 왜 사람들이 붐비는 야구장에서 보자고 했어요? 간 조려 죽는 줄 알았어요. 혹시 군중 속에 있으면 안전하기 때문인가요?”
철민은 노심의 경외의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대답하였다.
“아 그거요? 오늘이 바로 송진우 선수가 선발 등판하는 날이잖아요. 한국 프로야구의 살아있는 화석, 송진우를 보는 건 영광이라고요. 게다가 오늘이 바로 통상 이천탈삼진을 달성하는 기록적인 날이었잖아요. 좀 위험하긴 했지만 도전할 만한 일 아닌가요? 하하하.”
***
류근백의 종묘상은 기대보다 허름하였다. 유서 깊은 옥천군 별내리 유지의 자제가 운영하는 가게로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노심은 류근백이 경제적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작고 왜소한 중년의 남자가 수심에 찬 얼굴로 책상에 앉아 있었다. 창백 옹의 장자이자 파주 댁의 남편인 류근백이었다. 그는 상중이었지만 고인의 사체는 영안실이 아닌 아직 부검실에 안치돼 있었다.
충렬당에는 폴리스라인이 쳐져 있는데다 류근백 역시 유력 용의자로 경찰조사를 받고 있던 터라 그는 차라리 가게에 나와 있는 게 마음이 편하였다. 류근백은 유약해 보였다. 아버지와 부인의 죽음 때문인지, 범행을 감추려는 연기 탓인지 그의 얼굴은 초췌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미래보험 심사부 이명혁입니다. 류근백씨 되시죠? 죽은 부인께서는 저희 생명보험에 가입돼 있었습니다. 대단히 죄송하지만 확인해야 될 게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철민은 류근백에게 낯선 보험회사 명함을 건네며 정중하게 말하였다. 아마도 채권추심업무용 위장 신분증일 것이라고 노심은 생각하였다.
“그것이라면 경찰이 와서 이미 조사했어요. 그쪽 수사결과를 보시죠.”
류근백은 힘없이 대꾸하였다. 지금은 보험금도 필요 없다는 투였다. 철민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이렇게 물러설 것이라면 찾지도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어야 직성이 풀리는 철민은 집요하게 류근백을 자극하였다.
류근백과 철민은 신경전을 벌이며 언성을 높여갔다. 그러다 류근백이 철민과 노심을 밖으로 나가라고 거세게 항의하였다. 그러자 철민의 태도가 돌변하였다. 철민은 신경질 적으로 소리쳤다.
“류근백, 왜 그러시나. 당신이 죽였잖아. 식해에 파라코타 원액을 부었잖아. 밀가루에 마릭스 가루 섞었고. 다 알고 왔는데 뭘 시치미를 떼고 그러시나. 서로 피곤하게 말이야.”
철민은 거침없이 자신이 세운 독한 가설을 류근백에게 쏟아 부었다.
“무슨 말이에요? 전 결백해요.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요. 제가 아버지와 집사람을 왜 죽여야 하나요? 그렇게 극악한 사람은 아닙니다. 믿어주세요. 못 믿겠으면 식해에 독극물이 있는지 확인하면 되잖아요.”
류근백은 잔뜩 겁은 표정으로 말하였다. 경찰도 모르는 사실을 어떻게 보험사 직원이 아는지 류근백은 궁금했을 것이었다. 아니, 보험사 직원이 왜 이렇게 거칠고, 무슨 이유로 경찰보다 더 자신을 다그치는 지 당황스러웠을 지도 몰랐다.
“이봐, 당신 바람피우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잖아. 왜 죽일 이유가 없다는 거야? 누굴 바보로 알아? 또 충렬당은 전원주택단지로 개발될 예정이잖아. 땅값이 치솟은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일 텐데. 이정도면 네 범행 동기는 차고도 넘쳐.”
철민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류근백을 다그쳤다. 류근백은 자신이 바람 피운 이야기, 충렬당의 전원주택 개발 이야기를 듣자 참을 수 없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노심은 외려 기가 푹 죽은 류근백이 불쌍해 보였다. 한 숨을 푹 쉬며 류근백이 입을 열었다.
“그런 것들로 저를 범인 취급하실 수는 없을 것이에요. 당신이 말한 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잖아요. 경찰도 그런 부분을 다 확인해 갔다고요.”
류근백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설명하였다. 철민은 만족하지 못하였다. 철민의 모습은 억지로라도 죄를 자백 받으려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제 외도에는 이유가 있었어요. 집사람이 먼저 저와 아버지를 속였단 말이에요. 알고보니 집사람은 저희 집안과 원수처럼 지내는 홍우식의 딸이었어요. 말하긴 좀 곤란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젊은 시절 우리 집 마름으로 지내던 홍우식을 죽도록 때린 적이 있었어요. 아버지 성품이 워낙 까다로운 면도 없진 않았지만 홍우식이 둘째 고모님을 겁탈하려 했거든요. 홍우식은 사랑하였다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여동생이 천한 마름과 놀아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던 거예요.”
류근백은 힘겹게 일어나 일회용으로 포장된 인스턴트 커피스틱을 뜯어 종이컵에 쏟아 붓고는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커피를 녹였다. 본격적인 여름을 앞두고 냉방을 하지 않아 후덥지근한 종묘상 사무실에 향긋한 커피향이 퍼졌다.
9.
“그 일이 있은 후 홍우식은 이웃마을 처자와 강제로 결혼했고 영태와 영희를 낳았어요.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우식은 딸을 파주로 입양 보냈고 얼마 뒤 그는 영태를 데리고 서울로 야반도주했죠. 이십 년 뒤 금의환향해 지금은 대전에서 보란 듯이 살고 있고요. 무슨 영문인지 영희는 제게 시집을 와서 지금은 파주 댁이라고 불리고 있어요.”
류근백은 가느다란 탄식과 함께 숨기고픈 가정사를 불청객들에게 고백하였다. 하지만 그 고백은 류근백의 무죄를 항변하고 있었다. 그것은 노심이 찾던 정답이 아니었다.
“그럼 파주 댁이 홍영태 검사의 여동생이란 말이요?”
철민은 깜짝 놀라 류근백에게 물었다.
“그래요. 영태와 집사람이 자주 만나는 것을 수상해서 뒤를 캐다 알게 됐어요. 그 이후 나는 보란 듯이 바람을 피웠고, 집사람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죠. 그렇지만 전 집사람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요. 제발 믿어줘요.”
예상하지 못한 류근백의 고백에 철민은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철민은 류근백의 말을 건성으로 흘려들으며 고민에 잠겼다. 철민은 습관인 듯 휴대전화를 끊임없이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당신이 죽이지 않았다면 독극물이 어떻게 화전과 식해에 들어갈 수 있었죠?”
철민이 주춤하자 노심이 끼어들었다.
“파라콰타 원액을 집에 둔 건 저였어요. 하지만 그것을 식해에 넣거나 하진 않았다고요. 그건 제 실수였어요. 아침 출근길에 부엌에 들러 식해 한 컵 떠 마셨는데 깜빡하고 파라콰타 원액을 부엌에 두고 왔던 거예요.”
류근백은 조리 있게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런데 경찰에서도 식해를 조사했는데 독극물이 없었다고 하던데요. 화전 이야기는 경찰에서도 듣지 못했고요. 당신들은 어디서 듣고 식해와 화전에 제가 독극물을 넣었다고 다그치는 건가요?”
류근백은 노심과 철민을 향해 물었다.
“식해에서 독극물이 검출되지 않았다고? 화전도 남아 있는 게 없었다?”
철민은 혼잣말로 중얼 거렸다. 노심은 철민에게 ‘화전은 내가 지문을 치우느라 쟁반을 통째 가져갔어요’라고 귓속말로 말하였다. 그러면서 노심은 ‘화전을 달랑 한 접시만 붙였다는 건가? 이상하네’라고 생각하였다.
“그건 그렇고, 그렇게 위험한 독극물을 왜 집에 가져 간 거죠?”
노심은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느라 멍한 철민을 대신해 류근백을 추궁하였다. 류근백의 범행을 입증해야만 노심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자 밭에 잡초들이 무성해지기 시작했어요. 제초제를 뿌리려 파라콰타를 찾았어요. 마침 다 팔고 남은 것이라고는 파라콰타 원액뿐이었어요. 희석만 제대로 하면 원액이라고 특히 독한 건 아니죠. 그래서 원액을 집에 가져가 사용하고 남은 것을 다음날 출근하면서 가져온다는 게 그만 놓고 온 거예요.”
노심은 류근백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마릭스라는 제초제는 제가 집에 가져간 적도 없어요. 전 마릭스를 쓰지 않거든요. 더 강력한 파라콰타를 쉽게 구할 수 있는데 굳이 가루제재인 마릭스를 쓸 필요가 없으니까요.”
류근백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다. 노심은 더 이상 류근백에게 할 질문이 떠오르지 않았다. 노심이 류근백과 이야기를 나눌수록 충렬당 살인사건은 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거짓말.”
드디어 철민이 나섰다. 노심과 류근백은 철민의 입술에 눈길을 돌렸다. 철민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그 미소는 꽉 막힌 동굴 속의 한 줄기 빛처럼 노심에게 다가왔다.
“류근백, 당신 대단한데. 내가 상상한 것 이상이야. 당신 독극물을 식해에 직접 넣은 것이 아니었어. 냉동실에서 얼렸던 거야. 그래 그랬던 거야. 파주 댁은 시원하게 마시려 식해에 얼음을 넣었고 그 얼음이 녹으면서 식해가 독약으로 변했겠지. 창백 옹도 그렇게 독을 먹게 됐고. 아닌가?”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류근백은 살짝 말을 더듬었지만 완강하게 범행을 부인하였다.
“더 이상 버텨 봐도 소용없어. 방금 경찰에 있는 친구 녀석에게 문자를 받았다고. 얼음통에서 자네와 파주 댁의 지문이 나왔다는 군. 다른 지문은 없었다네. 그렇다면 얼음통에 손을 댄 사람은 자네와 부인 둘 뿐이라는 결론이군. 물론 얼음통에 든 얼음도 파라코타를 얼린 거였고. 당신이 노심 형님과 이야기 하는 사이 경찰 후배 놈과 문자로 연락을 주고받았던 거야.”
철민의 말이 끝나자 류근백은 신음 소리를 냈다.
“어때? 이제 왜 당신 부인을 죽였는지 말해보라고. 원수 집안의 딸이 자네에게 시집왔기 때문인가? 아버지를 죽여 가문에 먹칠한 못난 녀석.”
철민은 류근백을 강하게 자극하였다. 죄를 자백 받는 데는 확실한 증거를 내세우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하지만 수사현장에서 일하다보면 일일이 증거를 확보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품도 많이 들었고 증거를 구속력 있게 확보하는 것 또한 시간과 인력 등의 문제로 힘들었다.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확고한 정황 증거에다 적당한 물적 증거를 갖다 붙이는 게 정답이었다.
거기에 고도의 심리전이 더해지면 범행을 자백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철민은 류근백의 자존심을 자극하였다. ‘가문의 수치’라는 말을 할 때 철민은 마치 연극배우가 절정의 대사를 읊듯이 과장되고 격앙된 표정과 몸짓을 하였다. 류근백은 가문에 먹칠하였다는 소리에 발끈하였다.
철민이 내민 명백한 증거 앞에서 류근백은 절망했고, 철민의 선동 앞에 류근백의 마음은 순간 심하게 흔들렸다. 류근백은 무엇인가 억눌린 속내를 토해내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욕지기는 생리적인 현상과도 같아서 이성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류근백은 그렇게 무너졌다.
“우리의 결혼은 잘못된 것이었어요. 별내리 사람들이 저와 동갑네기 홍영태를 어려서부터 라이벌이라고 불렀죠. 어느 날 영태가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고향에 온 뒤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죠. 별내리를 류 씨 네 마을이라 부를 정도로 잘나가던 류 씨 가문의 장손 근백은 찌그러져가는 종묘상을 하는데 근백이네 마름 집 자식은 서울가 검사가 돼 돌아왔다고. 이런 걸 두고 인생유전이라고. 사람들은 아이들이 말썽 부를 때마다 ‘이놈아, 너도 공부안하면 근백 아저씨처럼 된다’며 제 이름을 팔아댔죠. 동네에서 나와 영태를 비교하는 이야기는 유행가처럼 퍼져갔어요. 자존심이 많이 상했죠. 그 도가 지나쳤어요. 집사람, 아니 홍영태의 동생을 죽이고 싶단 생각이 시도 때도 없이 들었어요.”
류근백은 자포자기 하였다.
“그러다 결국 범행을 실행에 옮겼어요. 집사람은 가족들에게 식해를 내놓을 때마다 먼저 한 잔 마시는 습관이 있었어요. 식해가 워낙 잘 상하는 음식이다 보니 자신이 먼저 마셔 보는 거죠. 그런데 그날은 어찌된 영문인지 그러지 않았던 거예요. 아버지가 드시고, 집사람이 먹게 된 거죠. 아버지를 죽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말이에요.”
10.
류근백은 범행을 털어 놓으며 아버지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노심은 이제 모든 게 끝났다는 해방감이 들었다. 철민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흐느끼는 류근백의 어깨를 감싸 앉으며 말하였다.
“류근백, 고마워. 솔직하게 털어놔서. 당신이 이렇게 진실을 밝히니 나도 비밀 하나를 쯤은 풀어 놓아야겠지.”
철민은 잠시 뜸을 들이다 노심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사실은 말이야, 얼음통에 든 독극물이고 지문이고 모두 거짓말이었어. 그냥 내가 지어낸 말이라고. 지문감식이 그렇게 짧은 시간에 이뤄질 수도 없는 일이잖아. 하지만 그냥 넘겨짚은 건 아니라고. 힌트는 당신의 잔꾀에 있었어. 당신이 말했잖아 집사람이 홍영태의 여동생이라는 사실을. 당신 말대로 별내리, 아니 류 씨 네 마을에서 못난 류근태 이야기는 유명하더군. 그만하면 당신이 범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 그러자 수수께끼는 술술 풀리더군.”
노심에게는 이 모두가 놀라운 일의 연속이었다. 철민은 노심에게 찡긋 눈인사를 보냈다.
“류근백, 당신은 모르겠지만 사건당시 여기 노심 형님이 현장에 있었어. 형님은 분명 피해자들이 식해와 화전을 먹었다고 말했지. 식해에서 독극물이 나오지 않았다면 남은 것은 얼음이 아니겠어? 나도 그 정도 머리는 있다고. 그런데 과연 얼음이었어. 대단해, 브라보. 여하튼 솔직하게 죄를 자백한 것은 용기 있는 일이야. 정의를 위하여서 말이지.”
철민은 류근백의 등을 토닥거렸다.
“이 녀석이, 나를 가지고 놀아? 너희들이 누군지를 몰라도 사람들이 너희 말을 믿어 줄 것 같아? 내가 누군지 알아? 나 류근백이야. 충렬당 류 씨 가문의 장자 류근백. 냉동실 얼음 따위는 이미 지난 밤에 내가 처리했어. 경찰이 그것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 난 또 버린 얼음통이 발각된 줄 알았네. 휴~!”
류근백은 꿇었던 무릎을 일으키며 비열하게 말하였다. 그러자 철민은 류근백이 말을 마치자 습관처럼 만지작거리던 휴대전화 폴더를 열었다. 철민이 휴대전화 버튼을 몇 번 조작하자 방금 전 류근백이 죄를 자백하는 동영상이 음성과 함께 재생되었다.
“탕!”
철민은 오른 손을 들어 손가락을 총 모양으로 만들더니 류근백을 향해 발사하였다. 미친 듯이 몸을 부르르 떨던 류근백이 자리를 박차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급작스런 일이라 노심은 류근백을 쫓을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철민은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때, 건장한 체구의 서너 명이 우르르 류근백의 종묘상으로 몰려들어왔다. 대전구장에서 노심의 주위를 맴돌았던 수상쩍은 남자들이었다.
“경찰입니다. 류근백, 당신을 충렬당 살인사건 용의자로 긴급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습니다.”
사복경찰들이 순식간에 류근백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노심은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당황했지만 진범이 잡혔다는 생각에 안도하였다.
“이봐, 황 형사. 이자가 바로 경찰관 살해사건 용의자네. 체포하게.”
철민은 야구점퍼를 입은 한 형사에게 노심을 지목하며 말하였다. 황 형사는 곧바로 노심의 팔을 뒤로 비틀어 수갑을 채웠다. 그것은 마른하늘의 날벼락과도 같은 일이었다.
“야 박철민, 이 나쁜 놈, 배신자. 난 경찰관을 죽이지 않았어. 않았단 말이야.”
노심의 노기가 하늘 끝까지 솟구쳤다.
“형님이 화전을 먹이자 경찰관이 사고를 내 죽었다고 제게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억울하시면 경찰서가서 누명을 벗으면 되죠. 죄가 있다면 죗값을 치러야죠.”
“더러운 놈. 네가 날 팔아먹어?”
노심은 철민에게 대들었지만 팔이 뒤로 묶여 제대로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조용히 해.”
황 형사는 반항하는 노심을 거칠게 제압하였다. 철민은 아무 일 없는 듯 태연하게 담배 한 개 피를 꺼내 물었다.
“형님, 형님이 죽였다는 그 경찰관, 제 동료였어요. 그 친구에게 태연이 만한 딸내미가 있는데. 그 아이 인생은 어떻게 하라고 그런 짓을 하셨어요? 형님!”
철민은 내뿜은 담배 연기를 쳐다보며 노심에게 말하였다. 노심은 자신의 딸, 태연이라는 말을 듣자 가족이 너무 보고 싶어졌다. 힘겨운 일상에 자주 놀아주지도 못해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들던 그 태연이가 미칠 듯이 그리웠다.
“박 선배, 류근백이 범인인 걸 어떻게 알고 우리한테 미리 연락했던 거예요?”
노심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황 형사가 철민에게 물었다.
“물론 확실한 증거는 없었지. 류근백이 끝까지 잡아 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그래도 니들에게 넘길 건수는 있었잖아. 저기 노심 형님 말이야. 손해 볼 것 없는 베팅한 셈이지.”
노심의 귀에 철민과 황 형사가 주고받는 이야기가 들렸다. 노심은 믿었던 철민의 배신감에 피를 토할 것 같았다. 무작정 이렇게 억울하게 인생을 망칠 수만은 없었다. 노심은 이를 악물었다.
‘수를 내야 한다. 반드시 누명을 벗고야 말겠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돌아가야 한다.’
***
철민과의 사전 교감이 있었던지 경찰서 안은 이미 사건해결을 위한 만반의 준비가 돼 있었다. 이례적으로 담당검사까지 경찰서에 와서 취조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부장검사의 동생이 죽은 사건이다 보니 담당검사도 부담이 됐을 것이다. 담당검사 곁에는 다부진 체격에 중간 키, 짙은 눈썹의 부리부리한 눈매의 부장검사, 홍영태가 서 있었다.
홍영태 검사 주변에는 한 무리의 형사들이 몰려 있었다. 그 중에는 철민도 섞여 있었다. 철민은 살살 웃음을 지으며 홍영태 검사에게 눈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철민은 스피커를 통해 취조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수첩에 무엇인가 열심히 적고 있었다. 이참에 철민은 부장검사에 잘 보이면 복직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까?
“아버지는 제가 죽이지 않았어요. 절대 아니에요.”
취조실 안, 류근백은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봐, 벌써 자백해 놓고 이래봤자 소용없다고. 자네 부친 몸에선 파라콰타와 마릭스 성분이 검출됐단 말이야. 서로 편하게 어서 끝내자고.”
황 형사는 가능한 정중하게 말하였다. 취조실을 지켜보고 있을 검사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건 아까 보험사 직원이라는 사람이 자존심을 건드려 감정이 폭발해서 얼떨결에 나온 말이에요. 저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요. 파라콰타는 정말 실수로 집에 놓고 온 것이라고요. 더구나 마릭스 같은 건 쓰지도 않았다고요. 믿어주세요.”
11.
류근백은 사람들이 자꾸만 홍영태와 비교하는 데 지쳐있었는데 파주 댁이 홍영태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고 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미워도 상대가 검사의 여동생인데 자기가 왜 그런 짓을 하겠냐고 황 형사에게 반문하였다.
또 류근백은 자신의 그런 아픔을 철민이 자극해 순간적으로 감춰뒀던 본능이 드러난 것이지 사실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지켜보는 홍영태 검사의 얼굴은 실룩 거렸다. 자신의 동생을 죽인 용의자를 담담히 보고 있는 홍영태 검사의 자제력은 놀라웠다. 류근백과 황 형사의 대화는 돌고 돌았다.
“부장님, 류근백이 저렇게 완강하게 무죄를 주장해도 이미 자백한 내용을 녹화한 게 있으니 기소에는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또 충렬당에 급파된 수사요원들이 충렬당을 샅샅이 뒤진 끝에 독극물을 담았던 얼음통을 찾았다는 연락입니다. 이게 다 박철민 씨가 류근백의 자백을 얻어낸 덕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결정적인 증거인 얼음통을 놓칠 뻔 했습니다.”
취조장면을 지켜보던 담당 검사가 홍영태 검사에게 말하였다.
“됐어. 다음”
홍영태 검사는 서둘렀다. 형사반장이 옆에 있는 이 형사에게 눈치를 보냈다. 이 형사는 취조실로 들어가 류근백을 데리고 사라졌다. 잠시 후 이 형사는 노심을 취조실 책상머리에 앉혔다.
노심은 몹시 힘이 들었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지난 일을 사실대로 조목조목 설명하였다. 충렬당에서 있었던 일이며 당황해서 도망가다 경찰관을 만났던 일까지 사실을 충실히 전달하였다. 진술을 하기 위하여 시간을 거슬러 생각을 정리하면 할수록 억울한 노릇이었다.
“당신 그걸 나한테 믿으라고 하는 말이야?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해? 당신과 멀쩡히 이야기를 잘 나누던 사람이 탁 밀자 억하고 죽었단 말이지? 그리고 파주 댁을 살피러 가자 죽어 있었다? 그런데 잡힐까봐 도망갔다? 내가 볼 땐 류근백 보다 당신이 범인일 가능성이 더 큰데. 창백 옹이 계약을 파기하려고 해서 당신이 죽인 거 아냐? 파주 댁도 당신이 집에 있던 독극물로 죽인 거 아냐? 대체 어느 것 하나 당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 주지 못하잖아.”
황 형사는 짜증을 내며 말하였다.
“또 당신이 범인 아니라면 왜 화전을 차에 실고 가서 도주한 거야? 경찰이 차를 세우자 당신은 잡힐까 두려워 화전을 먹도록 경찰을 회유했겠지. 당신은 이미 화전에 독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야.”
황 형사는 노심을 추궁하다가 취조실 유리를 향해 손짓을 하였다. 그 모습을 본 형사반장은 또 다시 이 형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 형사는 철민과 함께 취조실로 들어섰다. 철민은 잠을 못자서인지 피곤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눈매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노심은 그런 철민을 보니 만감이 교차하였다.
철민이 자리를 잡고 앉자 황 형사는 철민에게 노심의 범행사실을 직접 들었는지 묻었다.
“네, 분명히 들었습니다. 노심 부장이 지난 밤 제게 전화를 걸어와 자신이 경찰관에게 화전을 줬고, 잠시 뒤 경찰관이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철민은 대답하였다. 말은 ‘아’ 다르고 ‘어’ 달랐다. 철민은 구체적으로 노심이 경찰관을 죽였다고 증언하지 않았다. ‘화전엔 독이 들어 있다. 화전을 먹으면 죽는다. 화전에 독이 있는 줄 노심이 알았다. 노심이 경찰관을 죽이기 위하여 화전을 줬다.’
철민의 진술에는 이처럼 결정적인 이야기가 빠져 있었다. 대신 사람들은 철민의 이야기가 노심의 범행을 증언한 것이라고 믿고 싶었을 뿐이었다.
“내게 이렇게 하는 이유는 대체 뭐요?”
노심은 철민을 쏘아보며 말하였다.
“형님, 제가 불명예 퇴직을 했거든요. 꼭 명예를 되찾고 복직도 하고 싶었어요. 형님한테는 미안하게 됐어요. 형수님과 태연이는 제가 잘 돌볼게요. 너무 걱정 마세요.”
철민은 노심에게 말하였다.
‘그래, 그랬던 거였어.’
노심은 실망감에 고개를 푹 숙였다. 노심의 얼굴엔 허무한 기색이 영력하였다. 바보같이 무턱대고 난처한 상황을 드러낸 자신을 속으로 자책하였다. 이 순간 노심은 세상 누구보다 태연이 보고 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공부 안하고 컴퓨터 게임하는 태연이를 그렇게 심하게 혼내지 말았을 걸하고 후회하였다. 태연이가 갖고 싶은 신발이 있다고 말했을 때 사주지 못한 게 아쉬웠다.
노심은 호되게 꾸중을 한 날이면 잠자고 있는 딸아이 방에 들어가 한참을 쳐다보곤 했었다. 공부하랴, 학교 가랴, 학원 가랴 정신없는 일상에 시달리는 딸아이의 자는 모습은 벌써 열다섯 중학생이 됐지만 천사 같았다. 새벽 같이 접대술자리에서 만취돼 집에 들어와도 곱게 눈 붙이고 이불을 가랑이 사이에 끼고 자는 키 작은 태연이를 볼 때면 노심은 내일 또 전장 같은 사회에서 꼭 살아 가정으로 돌아오리라 각오를 새롭게 하곤 하였다.
“처음부터 날 이용할 생각이었군. 야구장에서부터 경찰을 데리고 온 거였군.”
노심의 목소리는 차분하였다.
“많은 걸 알려고 하지마세요. 다칠 수도 있으니까요.”
철민은 씨익 웃으며 농담처럼 대꾸하였다. 그러면서 철민은 가방에서 주섬주섬 서류를 취조실 책상에 꺼내 놓기 시작하였다. 깊은 숨을 내쉰 철민이 황 형사를 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철민은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험상궂은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웃음. 노심은 철민의 그 웃음에 울고 웃곤 했었다.
“황 형사님, 제가 노심 부장에게 몇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아직 죽은 창백 옹과 경찰관에서 검출된 마릭스가 어떻게 화전에 들어갔는지 명확하지 않아서요. 주제 넘는 일이지만 제게 생각이 있어 그러니 양해 좀 해주세요.”
황 형사는 당황하였다. 자신의 권한을 벗어난 일인 듯 황 형사는 취조실 유리거울을 쳐다봤다. 밖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그렇다고 제제도 없었다. 황 형사는 철민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철민도 고맙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는 철제의자를 엉덩이로 밀며 일어났다. 철민은 책상에서 수첩을 집어 들더니 취조실 유리거울 앞에 섰다. 수첩을 뒤적이던 철민은 흘겨 쓴 도표가 빼곡한 쪽을 유리거울에 바짝 갖다 댔다.
“현재까지 상황을 정리해 봤습니다. 류근백이 그의 부인인 파주 댁을 죽인 것은 확실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입증할 자료를 확보했고 자백이 담긴 동영상도 얻었으니까요. 그런데 화전에 든 마릭스를 먹고 죽은 경찰관은 누가 죽였을까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창백 옹의 죽음입니다. 아시겠지만 창백 옹의 체내에서는 파라콰타와 마릭스가 모두 나왔습니다. 창백 옹의 죽음이 파라콰타 탓인지, 마릭스 탓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류근백이 창백 옹을 죽였다고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류근백이 마릭스를 썼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없으니까요.”
사람들의 시선이 철민에게 쏠렸다.
“그럼 류근백이 화전에 마릭스를 넣었을까요? 전 아니라고 봅니다. 파라콰타만으로도 충분한데 번거롭게 마릭스까지 쓸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더 중요한 것은 류근백은 아버지를 살해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충렬당이 개발되면 막대한 이익이 생기니까 그 재산을 노려 창백 옹을 죽이지 않았을까 흔히 생각하시겠지만, 창백 옹에게 충렬당 매매계약을 취소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던 사람이 바로 류근백이었습니다. 류근백은 무능력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가문에 대한 자부심은 상당했습니다. 비록 자신이 못나 가문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고 생각했지만 류근백은 충렬당 만큼은 꼭 지키려 했었습니다. 그렇죠, 황 형사?”
12.
철민은 황 형사에게 물었다. 황 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사실입니다. 제가 창백 옹 살해 동기를 조사하던 중 그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류근백이 아니라면, 노심 부장일까요? 그럴 가능성도 낮습니다. 화전에 마릭스를 넣는 일은 사전에 철저하게 계획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마릭스 가루에 든 역한 냄새를 제거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몰래 밀가루에 섞어야 하는데다 파주 댁이 화전을 자주 만든다는 사실을 노심이 알기는 어려울 테니까요. 그럼 누가 화전에 마릭스를 넣을까요? 다시 말해 경찰관 살해범은 과연 누구란 말일까요?”
노심은 철민이 자신을 변호하는 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다. 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철민의 이야기를 쫓아갈 뿐이었다. 철민은 발걸음을 옮겨 노심 곁으로 다가갔다. 철민은 노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책상에서 다른 노트를 꺼내 들었다.
“화전에 마릭스를 넣은 범인은 바로 파주 댁이었습니다.”
철민의 말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였다.
“선배? 어떻게 죽은 사람이? 대체 무슨 근거로”
철민 앞에 앉아 있던 황 형사가 당황하며 물었다. 그 때 취조실 문이 열리고 홍영태 검사가 급히 들어섰다. 흥분한 모습의 홍영태 검사는 갑자기 철민의 따귀를 때렸다.
“어디서 굴러먹던 새끼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고 그래.”
홍영태 검사의 돌출행동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일순간 얼어붙었다.
“반장님, 제가 틀린 말을 하였다면 무고죄든 공무집행방해죄든 그 어떤 처벌도 달게 받을 테니 끝까지 말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철민은 화끈거리는 뺨을 손으로 비비며 형사 반장에게 말하였다. 반장은 난감한 얼굴로 홍영태 검사의 눈치를 살폈다.
“개수작 부리지 마, 박철민.”
홍영태 검사는 언성을 높였다. 형사들은 홍영태 검사의 비위를 맞추며 어떻게든 상황을 안정시키려 애쓰고 있었다. 형사 반장은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잠시 뒤 반장은 결심을 한 듯 굳은 표정으로 철민을 쏘아봤다.
“야 박철민이, 날 또 죽일 셈이구나. 그래 좋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한번 가보자. 너의 실력을 알고 있기에 널 한번 믿어보마. 대신 예전의 실수는 반복하지 마라. 그럼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반장은 저놈이 죽으려고 작정했으니 어디 한번 기회를 줘 보자, 저토록 확신하는데 수사에 도움일 될지도 모른다며 정중하게 홍영태 검사를 압박하였다. 반장에게는 ‘수사진척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명분이 있었다.
아무리 검사라도 명분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노심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어리둥절하였다. 자신을 범인이라고 경찰에 찔렀던 철민이 이제는 파주 댁이 범인이란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저렇게 나서서 철민이 얻는 게 뭐야? 철민이란 인간은 정말 진실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도 좋다는 것인가? 홍영태 검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나중에 설명 드리겠지만 우선 한 가지 가정을 해 보았습니다. 파주 댁이 창백 옹을 죽이려 하였다면 상황이 어떻게 됐을까요? 말도 안 된다고요? 아니요. 말이 됩니다. 파주 댁이 창백 옹을 죽이려 마릭스를 밀가루에 섞어 화전을 부쳤다면 모든 것이 다 들어맞습니다. 창백 옹의 몸에서 마릭스가 검출된 것과 화전을 얻어먹은 경찰관이 죽게 된 것까지 다 설명이 가능합니다.”
철민은 말을 이었다.
“모든 게 다 철저하게 계획된 것이었죠. 이미 말씀 드렸듯이 마릭스 가루의 악취를 사전에 제거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사건 당일 파주 댁은 남편을 출근시키고 여느 때처럼 부엌에서 화전을 붙였겠죠. 마릭스로 반죽한 화전을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날은 류근백이 파주 댁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던 날이었습니다. 이건 파주 댁도 염두에 두지 못한 중대한 변수였습니다.”
황 형사를 비롯한 몇몇 형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수도 있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철민은 힘을 얻었다.
“만일 파주 댁이 평소 습관처럼 식해가 상했는지 확인하느라 식해를 먼저 마셨다면 아마 창백 옹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파주 댁은 평소와 달랐습니다. 식해를 마셔보지도 않고 창백 옹에게 화전과 함께 내 놓았습니다. 왜 그랬을 까요? 아무래도 범행을 저지르다보니 심리적으로 불안했을 겁니다. 보통 초범의 경우, 범행을 앞두고는 심리적으로 매우 위축된 상태라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할 때가 많습니다. 게다가 창백 옹이 곧 죽을 것인데 식해가 상했는지 따져볼 필요도 없었겠지요. 때마침 노심 부장이 충렬당을 찾았고 파주 댁은 부엌으로 자리를 피했습니다. 창백 옹과 노심 부장은 충렬당 매매계약 파기 건으로 옥신각신했고 결국에는 심하게 다투기 까지 했죠. 파주 댁은 노심 부장에게 식해를 대접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겠죠. 그러다 파주 댁은 목이 말랐는지 식해를 한 잔 시원하게 들여 마셨습니다. 물론 류근백이 얼려둔 독극물 얼음이 담긴 식해였죠. 파주 댁은 그것이 독극물 식해라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 현장을 기록한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파주 댁 옆에 있는 컵에는 식해가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파라콰타는 반 숟가락만 마셔도 치사량인 맹독성 농약입니다. 그렇게 파주 댁은 고통스러워하며 죽어갔죠. 반면 창백 옹은 노심 부장과 다투느라 식해와 화전을 조금밖에 먹지 못했죠. 적은 양의 독극물이었지만 두 가지 독물이 한꺼번에 섭취된 데다 연로했던 창백 옹의 몸은 독물에 급속히 반응했습니다. 때마침 노심 부장이 창백 옹을 밀었고 독에 마비된 창백 옹은 어이없게도 넘어지며 디딤돌에 머리를 찧었습니다. 아무 사정을 모르는 노심 부장은 자신이 창백 옹을 죽인 줄로 오인하고 어리석게도 증거를 인멸하겠다고 자신의 지문이 남아 있을 화전 쟁반과 젓가락, 낫 등을 차에 싣고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다 동료들 사이에서도 악질로 소문난 경찰관에게 걸렸던 거죠. 그 악질 경찰관은 노심이 앞서 증언한 대로 들고 간 화전을 먹었고 마릭스에 중독돼 몸이 말을 듣지 않게 되어 교통사고로 즉사하게 된 것입니다.”
철민은 수첩을 넘겨가며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다.
“어때요? 이만하면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까?”
“좋아. 그렇다 치더라도 증거가 없잖아. 동기도 없고. 파주 댁이 그런 짓을 해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홍영태 검사는 인상을 찡그렸지만, 철민의 이야기가 얼토당토 안한 것은 아니라 아까처럼 대놓고 화를 낼 수 없었다. 형사들은 진지하게 철민의 이야기에 집중하였다.
“증거 있습니다. 동기도 확실합니다.”
철민은 자신 있게 말하였다. 노심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억울하고 분했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지금부터 진짜 범인이 등장합니다. 류근백의 자백 동영상에서 보셨다시피 파주 댁은 홍영태 검사의 여동생입니다. 여러분들도 깜짝 놀라셨죠? 저도 류근백에게 그 말을 듣는 순간 무척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 덕에 제 모든 추리는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13.
형사들은 철민의 입에서 홍영태 검사 이름이 나오자 일순간 표정이 확 바뀌었다. 더 이상 옛 동료들이 철민을 보호해줄 수 없을 수 정도의 극단적인 발언이었다. 철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류근백은 일 년 전 파주 댁이 홍영태 검사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파주 댁을 대놓고 멸시하고 공공연하게 바람까지 피우며 괴롭혔습니다. 파주 댁은 이런 류근백의 태도에서 극심한 모멸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 감정이 쌓이다 시아버지인 창백 옹을 죽이기로 결심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류근백을 노렸어야지? 왜 창백 옹이야?”
형사 반장이 나서 물었다.
“그렇죠? 저도 그게 의아했었습니다.”
철민은 능청스럽게 말하였다. 형사들은 어의가 없었다. 철민은 느릿하게 걸어 책상 위 서류더미에서 종이 한 장을 다시 집어 들었다.
“노심 부장님, 이 서류 아시죠?”
그것은 시행사와 여명종합건설과의 전원주택 개발에 관한 문서였다. 전원주택을 개발하는 방법 중에는 땅을 매입하는 회사가 따로 있고 전원주택을 짓는 회사가 따로 있는 경우가 있었다. 옥천군 별내리 전원주택 개발사업이 이런 방식이었다.
시행사가 땅을 매입하고 여명종합건설이 그곳에 전원주택을 시공할 계획이었다. 물론 대규모 개발의 노하우가 풍부한 종합건설이 실질적인 업무를 수행하고 시행사는 형식적인 땅 계약주체에 불과하였다. 세금 관계 및 인․허가에서 유리한 측면이 많은 방식이었다.
“네, 충렬당 일대 전원주택 개발 양해각서입니다.”
“각서를 체결할 때 담당이 노심 부장이었죠? 상대 쪽은 누구였죠?”
“네, 상대는 김민준이라는 대전지역 디벨로퍼였습니다.”
“김민준이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아뇨, 업계에서 웬만한 사람이라면 안면 정도는 있는데 그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노심은 영문도 모른 체 대답을 이어갔다. 파주 댁의 살해동기를 설명하겠다던 철민이 느닷없이 노심과 충렬당 일대 전원주택 개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형사들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황 형사는 옛 동료가 걱정됐는지 두 다리를 아래위로 떨고 있었다.
“당연히 모르겠죠. 김민준은 단지 농삿꾼에 불과하니까요. 그럼 이 자는 누군지 아시겠어요?”
철민은 서류를 내려놓은 뒤 사진 한 장을 노심에게 들이댔다.
“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사람이 이번 프로젝트의 실질적인 전주(錢主)라고 들었습니다. 저 사람이 사모펀드 형식으로 이번 전원주택개발에 이십억 원 규모의 프로젝트 파이낸싱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창백 옹에게 전달된 계약금 이억 원도 그 사모펀드에서 나왔다고 하더군요.”
노심의 대답이 끝나자 철민은 사진을 형사들에게 돌려 보여줬다.
“수십억 원을 동원하고 있는 큰 손,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바로 홍일우입니다.”
이번엔 형사들도 표정관리를 할 수 없었다. 형사들의 얼굴은 노랗게 떴다. 그런데 의외로 반장은 눈 꼬리를 아래로 내리며 얼굴에 희색을 띠었다.
“그렇습니다. 홍영태 검사의 사촌, 홍일우입니다. 알고 싶진 않지만 우리는 홍일우가 그만한 돈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대전에서 소문난 망나니에다 노름꾼으로 신용불량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런 돈이 어디에서 났을까요?”
철민은 형사 반장을 쳐다봤다. 슬며시 웃어 보이는 반장을 보자 철민은 힘이 났다.
“그럼 이쯤에서 파주 댁이 창백 옹을 살해한 동기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류근백의 만행을 볼 때 마다 파주 댁은 류근백이든 시아버지든 누구라도 죽이고 싶었겠죠. 그런 생각이 든다고 이십 년을 살아온 가족을 죽이진 않겠죠. 누군가 그러라고 설득력 있게 사주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그런데 류근백은 파주 댁이 홍영태 검사와 바람난 것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자주 만났다고 말했었죠? 류근백이 파주 댁과 홍영태 검사와의 관계를 알게 된 것도 이 때문이라고 증언했을 정도였으니까요. 홍영태 검사가 왜 그렇게 자주 만났을까요?”
철민은 홍영태 검사를 노려보며 말하였다.
“참, 홍영태는 홍일우의 펀드가 창백 옹에게 계약금을 입금하던 날 농협 은행동지점에서 자신의 상가를 담보로 이십억 원을 대출받았더군요. 이것이 그 서류입니다.”
철민은 서류를 한 장 더 내놓았다. 노심은 철민이 언제 저런 것 까지 조사했는지 궁금하였다.
“뭡니까? 아직도 모르겠다는 건가요?”
철민은 취조실 책상위에 마지막 남은 노트를 집어 들며 말하였다. 철민의 목소리에는 흥이 묻어 있었다. 형사들은 고개만 연신 갸웃거렸다. 누군가는 선생에게 꾸중 듣는 학생마냥 뒷머리를 긁적였다.
“여기 수사팀이 확보한 파주 댁의 일기장이 있습니다. 이 노트입니다. 경찰에서도 이 일기장을 검토했었지만 아무런 단서도 발견할 수 없었죠. 설마 죽은 사람이 범인일 것이란 생각을 하지 못했으니 제대로 일기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홍영태 검사가 파주 댁의 오빠라는 사실도 그 때는 몰랐으니까요. 파주 댁은 무척 신중한 사람인 듯 일기에서도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표현들을 많이 썼습니다. 때문에 저도 처음 일기를 읽었을 때는 무슨 듯인지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파주 댁은 아마 시인이 되셨으면 좋았을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은유적인 일기를 해독하려면 두 가지의 실마리를 주목해야 합니다. 첫 째는 파주 댁이 범인이고, 둘째는 홍영식 검사가 파주 댁의 오빠라는 사실입니다. 그럼 제가 파주 댁의 일기 중 한 대목을 읽어보겠습니다.”
철민은 파주 댁의 일기장을 펼쳤다.
“가족이 없는 삶을 살아본 적 있나요? 세상에 피붙이는 단 한명도 없다는 고독을 느껴본 적 있나요? 겪어 보지 못하였다면, 상상할 수 없다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어린 시절이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보잘 것 없는 찬거리와 허름한 살림살이. 양계장집 가족들의 식사는 언제나 제게 동경이었어요. 하하 호호 웃으며 피붙이가 모여 한 뚝배기에 숟가락을 담그는 모습. 언제나 배 아픈 부러움이었죠. 그런데 지금은 괜찮아요. 하늘처럼 큰 당신이 제게 나타났잖아요. 아버지 이야기, 어머니 소식, 당신의 멋진 삶. 그 모든 것들이 내 삶이라니 믿을 수 없어요. 그런 당신이 내게 말하네요. 내 아픔, 내 고통, 아버지의 절망을 씻어주겠다고. 내 도움이 절실하다고. 해야죠. 물론 해야죠. 하지만 너무 하기 싫어요.”
철민이 파주 댁의 일기장을 몇 장 뒤로 넘겼다.
“홍영태 검사님, 당신 이야기도 있네요. 자 들어보세요. 이 날은 왠지 좀 직접적인 표현들이 많아요. …. 인내는 써도 열매는 달다. 당신은 고시합격으로 인생역전하며 이 말의 참 뜻을 절감하였다고요. 제 인내는 무척 쓰답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다. 원수의 집에서 그들의 원수가 되라는 당신. 호랑이의 송곳니를 뺏는 것도 부족하다는 당신. 진정한 복수는 호랑이를 잡는 게 아니라 호랑이 굴을 빼앗는 것이라는 당신. 당신의 그 무시무시한 가족에 대한 사랑이 두려워질 때도 있습니다. 하다가도 어린시절 양계장집 뚝배기에 담긴 피붙이들의 숟가락을 떠올립니다. 사무치도록 얻고 싶었던 당신. 당신의 괴로움이 곧 제 아픔입니다. 당신의 괴로움을 씻어 드릴게요. 이 한 몸 부셔지더라도.”
14.
철민은 노심 부장에게 죄를 씌우려는 계획을 암시하는 대목을 찾아서 읽었다. 사건이 있기 바로 전날의 기록이었다.
“땅딸 맞은 체구에 넓적한 얼굴, 딸아이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는 볼 품 없던 사람. 이 못난 여자의 굴레를 그가 대신 져야 한다니. 어쩜 당신은 그리도 좋은 머리를, 그 냉철한 이성을 지옥불보다 더 뜨거운 복수에 쏟는 것일까요. 내게 새 인생과 생명을 불어넣은 당신의 뜻이기에, 가족 사랑을 품은 남자에 대한 미안함을 애써 외면하려 합니다. 아, 땅딸 맞은 체구의 넓적한 얼굴, 제발 내일은 딸아이가 아파 한 많은 충렬당 같은 곳엔 오지 못하길 기도합니다. 큰 비가 내려 충렬당 오는 길이 끊어지길 소망합니다.”
철민이 파주 댁의 일기를 읽어 내려갈수록 황영태 검사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누르고 눌러도 비집고 올라오는 회한이 황영태 검사를 괴롭혔다.
“노심 부장님, 충렬당 가시기 전에 교육 받으신 거 있죠? 계약을 파기하려고 하면 어떻게 대처하라고 회사에서 지침이 있었잖아요. 처음엔 비굴하게 다음엔 법적 대응, 최후엔 공포분위기 조성하며 협박하라고. 어떻습니까? 과연 노심 부장이 사건 당일 충렬당을 찾은 게 우연일가요? 그것은 노심 부장님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한 계략이었습니다. 파주 댁이 창백 옹을 독살하던 날, 노심 부장은 충렬당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창백 옹의 계약 파기로 인한 다툼이 예견돼 있었죠. 파주 댁의 증언도 미리 준비돼 있었겠죠? 노심 부장이 창백 옹과 심하게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고. 돈을 대며 깊숙이 관여한 누군가의 각본은 이처럼 참 비정한 것이었습니다.”
철민은 노심을 보며 말하였다. 그리곤 철민은 고개를 돌려 홍영태 검사를 봤다.
“홍영태 검사님, 동생에게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가족(아버지)의 원한을 갚기 위하여 가족(파주 댁)을 이렇게 희생시켜도 되는 것입니까? 당신의 그 그릇된 복수심 때문에 어려서부터 고생만 했던 파주 댁이 맹독에 고통스러워하며 죽어간 게 아닙니까?”
철민은 홍영태 검사를 심하게 다그쳤다. 홍영태 검사는 부들부들 떨며 털썩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철민은 홍영태의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이제 정리가 되셨습니까, 검사님? 김민준과 사촌 홍일우를 내세워 충렬당을 사들이려고 했었는데 류근백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노심 부장에게 누명을 씌우려는 계획을 박영태 검사님이 세우셨잖아요. 그걸 파주 댁에게 사주했고. 파주 댁이 창백 옹을 죽인 동기는 류 씨 네 집안에 당한 수모를 갚기 위한 홍씨 집안, 아니 홍영태 검사의 복수심이었습니다. 어쩌면 복수를 빌미로 류 씨 마을을 홍씨 마을로 만들어 경제적 이익을 독차지 하려고 했을 지도 모르죠.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여러분, 몇 년 전 홍일우 사건을 잊은 건 아니겠죠?”
홍일우 사건이라는 말이 나오자, 황 형사가 무릎을 탁 쳤다. 팔짱을 낀 형사 반장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담당 검사도 그제야 철민의 이야기를 완전히 이해한 듯 이마를 짚었다.
“반장, 홍영태 검사를 체포하세요.”
충렬당 살인사건 담당검사는 형사 반장에게 지시하였다. 형사들이 홍영태 검사를 포박하였다.
“아무래도 홍 검사님과 전 악연인가 봅니다. 또 이렇게 좋지 않은 일로 만나니 말입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제가 이긴 것 같습니다. 그럼 푹 쉬십시오. 감방에서.”
철민은 홍영태 검사를 보며 피식 웃었다. 홍영태 검사의 얼굴은 울그락 불그락 거렸다. 잠시 뒤 홍영태 검사는 옷매무세를 가다듬더니 자신을 포박하고 있는 형사들에게 비켜줄 것을 요구하였다. 형사반장이 형사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박철민 형사, 집요하군. 자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이런 짓을 하는가? 대체 우리 가족의 아픔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그러느냔 말이야.”
홍영태 검사는 넥타이를 만지며 말을 이었다.
“우리 영희는 참 불쌍한 아이였어. 어린 시절 가족도 없는 고아로 속여 파주의 한 양계장집으로 입장됐지. 모든 게 창백 옹이 강요한 일이었어. 내가 사법시험을 합격하고 검사가 되자 아버지가 그 때서야 그 사실을 말해줬지. 난 동생을 찾고 찾았어. 그러다 결국 양계장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는 동생을 만날 수 있었지. 이십년이란 시간 동안 영희는 서러움 받고 고생했어. 이게 다 별내리 류 씨 집안사람들 때문이었어. 홍씨 사람은 류 씨와 사랑하면 안 되는 것인가? 왜 아버지가 창백 옹에게 그토록 모멸을 당하고 고초를 겪어야 했는지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치가 떨리네. 류 씨의 눈 밖에 난 아버지는 류 씨 네 마을 어디서도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고, 땅 한 평 없었던 우리는 먹다 남은 음식을 주워 끓여 먹으며 처절하게 생활했어. 류 씨 네는 아버지를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 우리 가족을 고향에서 살지 못하도록 온갖 비열한 방법을 다 썼지. 결국 우리 가족은 서울로 피난 가듯 떠나갔고 난 죽어라 공부했지. 보란 듯이 성공해서 이 빚을 갚아줄 거라고. 결국 아버지는 잘 먹지도 못하고 고된 노동을 하다 견디지 못하고 공사장 바닥에서 돌아가셨고 난 다시 한 번 다짐했지. 아버지 원수 류 씨를 가만 두지 않을 것이라고. 이곳으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마을 사람들에게 소문을 퍼드리는 것이었어. 나와 근백을 비교하는 이야기들 있잖아. 사람들은 남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특히나 류 씨 네 근백이와 그 집 마름 자식과의 이야기는 정말 드라마틱하잖아.”
홍영태 검사의 근엄한 얼굴에 슬픔이 번졌다. 매서운 눈에는 끈끈한 눈물이 감돌았다.
“난 영희를 류 씨 네에 시집보냈어. 영희가 내 동생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으니까. 나는 영희가 고향에서 떵떵 거리며 충렬당에서 사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네. 이상하지 않나? 원수 집안이지만 한 마을에서 우러러보는 그런 집에 대한 동경을. 시간이 지나자 그것으론 부족했어. 그러다 충렬당을 사들일 계획을 한 거야. 호랑이굴을 빼앗는 완전한 복수극이었지. 물론 그 일은 합법적인 거였어. 그런데 근백이가 나와 영희의 관계를 알게 된 거야. 근백이는 참지 못하고 대놓고 바람을 피우고 영희를 괴롭혔지. 하지만 자기도 자존심이 있는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영희의 비밀을 말하지 않더군. 창백 옹에게 까지도 말이야. 처음엔 누굴 죽일 생각 같은 건 없었어. 근데 근백의 횡포가 심해지자 그의 아버지를 해칠 생각을 하게 된 거야. 어쩌면 근백의 횡포는 계기에 불과했을 지도 몰라. 나와 영희가 이렇게 잘 살고 있으면 무엇 하는가? 아버지는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셨는데, 창백 옹은 여전히 건재하고 잘 살고 있는데. 결국 우리는 아버지를 위한 진정한 효를 행하기로 마음먹었던 거야.”
홍영태 검사는 말을 마치자 스스로 걸어 나갔다. 형사들이 홍영태 검사를 둘러쌌다.
“홍영태 검사님, 당신을 충렬당 창백 옹 살인교사죄로 긴급체포합니다. 아시겠지만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변호사를 선임 하겠네.”
홍영태 검사는 말하였다. 형사 반장은 홍영태 검사의 두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철민은 노심에게 왼쪽 눈을 살짝 감아 보였다.
15.
경찰서를 나선 노심은 맥이 탁 풀렸다. 우르르 쿠쿵. 여름 장마를 알리는 비가 내렸다. 습기를 머금은 비바람이 노심의 볼을 간질였다. 어둑한 하늘은 그날이 마치 심판의 날임을 알리듯 성스러웠다. 긴장의 끈을 놓은 순간 남자의 정신은 급속히 고갈되었다. 그래도 기쁜 것은 기쁜 거다. 노심은 어색한 웃음을 건네며 철민에게 다가갔다.
“박 과장, 고마워요. 박 과장에 대해 오해를 했었나 봐요. 미안해요.”
“형님,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전 괜찮아요. 제가 형님을 이용한 것 같아서 죄송해요. 이 지역에서 홍영태 검사의 힘이 막강해서 그의 비리를 폭로하려면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었어요. 형님께서 본의 아니게 고생하셨어요. 죄송해요.”
노심은 허허허 웃었다. 더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근데 박 과장은 원래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그렇게 잘 돕는 정의파인가 봐요? 이렇게까지 도와줄 줄은 몰랐거든요.”
노심이 철민에게 묻자, 박철민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하였다.
“정의파는 무슨 그런 말씀을. 이천 년 칠 월 팔 일, 대전 동구에서는 칼국수를 나눠 먹은 한 마을 칠십대 할머니 세 명이 돌아가시는 사건이 있었어요. 조사 결과 이들이 먹다 남은 칼국수에서는 가루살충제, 마릭스 성분이 검출됐었죠. 할머니들은 칼국수를 해 먹기 위하여 밀가루로 반죽을 하다 모자라자 부엌 선반위에 있던 농약 분제를 밀가루로 착각, 함께 섞어 반죽을 해 끓여 먹은 뒤 변을 당했던 거예요.”
박철민은 담배를 꺼내 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제가 그 사건을 맡았는데, 칼국수를 나눠 먹는 자리에 있던 사람 중에 홍일우라는 남자만은 유일하게 살아남았어요. 홍일우는 죽은 할머니의 상속인이었어요. 정황상 홍일우가 할머니들을 죽인 범인이 확실한데 입증할 방법이 없었어요. 좀 심하게 다뤘는데 홍영태 검사가 은밀하게 홍일우 수사에 압력을 가했어요. 홍일우가 바로 홍영태 검사의 사촌이었어요. 저는 격분했죠. 그러다 저는 홍일우를 심하게 때렸고 그게 문제가 돼 교통과로 보직을 옮겼다가 결국 불명예 퇴직하게 됐고요. 웃긴 건 홍일우가 상속받은 땅을 헐값에 사들인 홍영태 검사는 그곳에 상가를 지었고, 그 상가는 지금 백억 원이 넘는 대전 동구의 알짜건물이 됐죠.”
“그럼, 박 과장에게 제가 충렬당에서 겪은 일을 했을 때 이미 홍영태 검사가 개입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군요. 어쩌면 박 과장이 여명종합건설에 입사한 이유도 홍영태 검사와 관계가 있겠군요. 그래서….”
“형님, 아니에요. 그냥 형님처럼 정직한 분이 당하면 안 되니까요. 마침 제가 잘 아는 곳이기도 해서 나서다 보니 일이 이렇게까지 됐네요. 실은 퇴직하고 혼자 홍영태 검사와 홍일우 뒤를 조금 캐기는 하였지만 그게 불법이라 함구하겠습니다.”
박철민과 노심은 서로를 한 번 쳐다보고 씩 웃었다. 노심이 충렬당에서 도망쳤던 때로부터 스물아홉 시간이 지난 뒤였다. 스물아홉 시간 동안의 격랑. 노심에게 스물아홉 시간 전과 후의 세상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었다. 인생에서 스물아홉 시간 정도 사라진다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끝.
#디엠지미디어 자체 생산 부동산 소재 중편 소설입니다.
#본 작품에 사용된 삽화는 디엠지미디어 로고를 디자인한 김성원 화백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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